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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카페에 출근했을 때도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3번 테이블에 앉아 전면 책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근심을 알지 못했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위에 쓴 단 세 가지. 그는 항상 테이블 위에 모자를 내려놓곤 했다. 그 모자가 놓이는 곳은 늘 3번 테이블 위였고, 그는 언제나 전면 책장만을 바라보다가 주문한 음료가 바닥을 보이면 카페를 떠났다. 음료는 오직 볼리비아 커피만을 주문했다. 그를 위해서 특별히 볼리비아 원두를 상시 구비해두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책장을 바라볼 뿐 단 한 번도 책장에서 책을 꺼내 펼쳐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우리 아르바이트생 사이에는 거대한 전면 책장을 가지고 싶어하는 가난한 작가 정도가 그의 정체가 아닐까 하는 가정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나는 어느 날부턴가 그의 단정한 중절모를 좋아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그의 중절모는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한 원형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의 중절모에 대한 사모의 정은 어느덧 그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볼리비아 커피를 그에게 서빙하는 일을 내가 전담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일주일 째가 되었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에게는 무언가 묘한,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존재 같은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오늘 용기를 내어 그에게 연락처를 담은 쪽지를 전하기로 했다. 볼리비아 커피를 내려놓고 자연스레 곧바로 쪽지를 꺼내어 내미는 것이 작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체 쪽지를 어디에서 꺼내는 것이 좋을까 하는 점이었다. 서빙 쟁반에 쪽지를 함께 담아 가는 것은 일단 최악이다. 조리대로부터 3번 테이블까지 족히 10걸음은 넘었다. 본편을 보기에 앞서 티저 영상을 10번이나 보는 것은 마트에서 시식용 만두를 10개나 집어먹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김빠지는 일을 저지를 수는 없다. 아르바이트 제복에서 꺼내어 준다고 단순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여성용 제복 치마에는 주머니가 없다. 왼쪽 가슴 께에 주머니가 있지만 그런 애로틱한 행동은 위험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고민 끝에 내가 생각해낸 것은 조그만 접시에 쪽지를 깔고 그 위에 쿠키 한 조각을 올려 서비스처럼 건내는 것이었다. 염소가 아닌 이상 쿠키와 그 밑의 쪽지를 함께 먹을 리는 없었다. 아니, 잠깐 염소도 그런 일은 곤란하게 여길 것이었다. 아무튼 이건 괜찮겠다고 동료들도 박수를 쳤다. 


결전의 순간이 왔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가 볼리비아 커피를 주문했고, 점장이 직접 특급 커피를 내려주었다. 점장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건투를 빌었다. 동료들의 눈빛에서도 비장한 기운이 느껴졌다. 서빙 쟁반에 커피를 올리고 작은 접시와 쪽지, 쿠키도 세팅을 마쳤다. 출격이다. 가슴이 뛰었다. 어쩐지 좋은 예감의 두근두근. 그의 중절모 곁에 커피와 쿠키를 내려놓고 나이스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이제 그가 메시지를 읽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성공이었다. 나는 다른 손님에게 커피를 나르면서도 계속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읽었나. 아직이다. 이번에는. 역시 아직이다. 이제는 읽었겠지. 아직이었다. 그리고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쿠키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카페를 빠져나가고 말았다. 경멸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곁눈질로라도 쿠키 아래의 숫자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화번호를 의미하는 것쯤은 쉽게 파악했을 것이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강렬한 메시지를 무시하는 쪽을 선택했다. 당신따위와 내가 연락이나 주고 받을 사람으로 보이는가 하는 경멸이 담긴 무시였다.


그날의 일은 1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중절모를 혐오하는 여자 중의 한 명으로 살아가고 있다. 



2014. 9. 2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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