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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살며시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했다. 이건 진짜다. 그런 결론에 이르렀을 때 가장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이 된 순간의 감각이 느껴졌다. 가령 아끼는 사기컵을 떨어뜨렸는데 무심코 발등으로 받아낸 것 같은 그런 느낌.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는 내 눈 앞에 이런 형태로 놓여 있었다. 


“음… 글쎄요. 당신의 말을 제가 95% 정도 신뢰한다고 쳐도… 미심쩍은 건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세계는 제가 이전에 살던 세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 같은데요?”


“당신이 이쪽으로 건너올 때 당신의 모든 기억들도 리뉴얼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죠. 그건 아주 미세한 작용입니다. 성냥개비탑에 쌓여 있는 성냥개비 하나의 각도를 1도 정도 미묘하게 틀어버리는 그런 정도의 작용이라고 흔히 표현하곤 하는 그런 거죠.”


“그런 식의 표현은 들어본 일이 없는데요.”

“물론, 이쪽 세계의 표현입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수명이 급격히 단축된다거나 노화가 촉진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나요?”


“그런 SF영화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아요. 대부분의 것은 저쪽과 똑같습니다. 당신도 평소의 당신처럼 그저 살아가면 됩니다. 단 한 가지….”


“단 한 가지?”


“이건 제가 직접 말하기 조금 뭣한 거라서요. 단 한 가지만은 저쪽과 전혀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가 장차 저쪽과 이쪽의 세계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겠지요.”


“어려운 이야기네요.”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저쪽의 세계에서도 아마 당신은 이런 일을 겪는 사람들을 가끔씩 보았을 겁니다. 멀쩡히 은행의 요직으로 근무하던 친구가 갑자기 소설가가 되겠다고 직장을 때려치우는 일 같은 것들, 몸무게를 100kg에서 50kg까지 감량하겠다고 선언했던 친구가 어느날 역도 선수가 되어 있는 것 같은 일들이 종종 발생하잖아요. 대체 왜 그 친구들이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되었는지, 급격하게 인생의 방향타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알 수 없었겠지요. 그런 일들의 대다수가 아마 이쪽 세계나 그쪽 세계에서 당신이 살던 저쪽 세계에 개입한 결과물들일 겁니다. 그 친구의 성격, 취향, 외모, 인간관계 모든 것이 그대로이지만 단 하나 결정적인 무엇인가만 미묘하게 틀어져버리는 거죠. 그리고 그 미묘한 하나가 모든 걸 바꾸어 놓습니다. 당신에게서 무엇이 바뀌게 될지는 앞으로 당신만이 알게 될 겁니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어떤 거죠?”


“당신은 왜 저를 선택한 거죠?”


“선택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네?”


“그럼 이만.”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내려놓은 중절모를 다시 머리에 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멍한 상태로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어렴풋한 미소를 짓더니 뚜벅뚜벅 어딘가로 걸어가버렸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성의 힘으로 열심히 분석해보려고 했지만 좀처럼 명쾌한 결론이 내어지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걷기 시작한다면 어쩐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될 것 같아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해가 기울었다. 강변의 밤 공기는 냉담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버티다가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 시름시름 앓거나, 한밤의 폭주족에게 하룻밤을 강요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봤자 어차피 나는 저쪽과 똑같은 내가 아닌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뚜벅뚜벅 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언덕배기에 자리한 3층 빌라의 2층 202호는 내 방이었다. 내일이면 인근의 카페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아, 왠지 그것만은 절대 싫은데 라는 기분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꿈 속에서 나는 내 생일선물을 매번 잘못 사오는 한 남자에 대한 꿈을 꾸었다. 비록 꿈에 불과하지만 그런 치는 절대로 연인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2014. 9. 1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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