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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구는 진보하지 않는다, 다만 그 중용을 찾아갈 뿐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라는 책을 1978년에 세상에 내놓으며 ‘가이아 이론’을 주창했다. 이 이론은 지구가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이며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지구라는 유기체를 유지시키기 위한 세포와 같다고 말한다.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나무’와 같은 생명체로 여겼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철저한 진화생물학자는 이 이론에 냉담하지만, 오히려 인문학자들은 ‘가이아 이론’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가이아 이론’이라는 명칭으로는 제임스 러브록에 의해 1978년에 발표되었지만 유사한 생각은 동아시아 일대와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서 상식적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 시원을 따져가면 바이칼 호수에서 출현한 인류인 몽골리안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리안 루트를 통해 퍼져나간 몽골리안 계열의 후손들은 그 피 속에 모두 ‘어머니 대지’의 사상을 함유하고 있다. 어머니 대지는 모권 사회 혹은 모계 사회의 흔적일 가능성도 높다. 이 사상 속에서 ‘어머니’는 가족을 따뜻하게 보살피고, 기르며, 안전하게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존재이다. 어머니의 대목적은 평화와 생명의 유지다. 번영과 발전은 오직 대목적을 위해 필요한 수준에서만 요청된다. 평화와 생명이 유지되는 수준에서 번영과 발전을 이루면 그 이상을 추구해가지 않는다.
가이아 이론에서 표현되는 지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구의 대목적은 지구의 유지이지, 지구의 확장이나 지구의 발전이 아니다. 지구는 자신이 가장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방향으로 생명체의 개체 수를 조절하거나, 기후 등의 균형을 맞춰 간다. 지구는 지구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진화’라는 개념을 더 이상 판단이 필요 없는 과학 용어로 단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진화’ 라는 것에도 사실 가치판단은 들어 있다. 진화라는 과학 용어 속에는 인류라고 하는 생명체가 과거의 생명체보다 ‘진보’했다는 가치 판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인류는 고대의 생명체보다 진보한 생명체다. 하지만 가이아 이론을 빌리자면 인류는 결코 진보한 생명체라고 할 수 없다. 인류는 다만, 변화하는 지구 환경에 더 적절한 생명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만약 지금의 인류를 고대의 지구에 가져다 놓는다면 인류는 결코 유능한 생명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공룡들과 핵전쟁을 벌이다가 지구 자체를 송두리째 날려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학이란 것도 사실은 주관적인 학문이다. 무엇을 더 들여다볼 것인가, 어떤 자료를 더 가치 있게 여길 것인가, 과학자의 관점에 따라 연구 결과에 대한 해석도 달라진다. 이미 현대 물리학은 양자론을 지나며 스스로 자신의 객관성에 모라토리엄을 선포한 바 있다. 과학에 더 이상 정답은 없다. 끊임 없이 이 광대한 우주에 질문을 던져볼 따름이다.
수 세기 동안 절대 진리의 성역을 차지했던 과학도 이러한 마당에 ‘정치’에 정답이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보수도, 진보도 스스로가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구는 분명 진보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그렇다. 그 지구 속의 사회는 진보하는가? 역사는 진보하는가? 우선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고만 말해둔다. 우리는 흔히 고대 문명 사회가 노예제 사회였다고 배워 왔지만, 최근에 드러나는 사료들에 의하면 고대 문명의 다수가 노예제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대 문명사회는 오늘날에 비해 인종차별, 성차별 등이 훨씬 덜한 되려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회였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까지 나는 나선형으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하는 E.H 카의 역사관을 신뢰해왔다. 그러나 공부를 해갈 수록 그러한 역사모델이 굉장히 협소한 역사구간을 표본으로 삼아 나온 결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록이 남지 않은 수 십 만년 인류사의 페이지가 사라져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인간이 지구에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가이아 이론’에서 말하는 지구의 대목적을 위해 쓰이는 세포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인류는 아마도 진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는 단지 그때 그때 자신이 가장 평온하고 건강한 상태로 지낼 수 있는 삶의 형태를 선택해왔을 것이다. 인류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 앞서 언급한 ‘가장 평온하고 건강한 상태’에 하나의 명칭을 부여했다. 그것이 바로 ‘인권’이다. 그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유, 정의(평등), 연대’라는 세 가지 가치가 요청된다.
전통적으로 보수, 혹은 우파는 ‘자유’의 가치에 더 중점을 두고, 진보 혹은 좌파는 ‘정의(평등)’의 가치에 더 중점을 둔다. 하지만 어느 한 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인권’이라는 가치를 온전히 보장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대’를 통해 ‘자유’와 ‘정의(평등)’의 가치 사이의 균형을 찾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구는 진보하지 않는다, 다만 그 중용을 찾아갈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어느 한 쪽 방향으로만 명백하게 앞 서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가면을 쓴 병증일 수 있다. 우리는 역사의 중용을 찾아가야만 한다. 그 길에 마르크스는 ‘인권의 승리’를 확실한 목표점으로 삼았다.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애덤 스미스도 마찬가지다. 알려지지 않은 그의 후기 저서에서 스미스는 자본가 이전에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가치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지금 이 시공 속에서의 가장 인간다운 삶은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공자의 중용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중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중(時中)이요, 전관(全觀)의 중용이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참고한 중에 가장 적절한 것. 나는 그것을 찾아가고 있다.
2014. 5. 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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