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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민주주의 (2) 



  정도전은 왕족들과 문벌귀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치와 백성의 전반적인 삶을 돌보기보다는 불교를 통해 개인적 구원만을 추구하는 지도층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두 가지의 큰 그림을 그렸다. 하나는 신권에 의해 왕권이 규제되는 정치제도, 또 하나는 불교라는 종교가 구심이 된 종교 중심 사회에서 상식이 중심이 되는 인문사회로의 대전환이다. 전자는 <경국대전>을 통해 후자는 <불씨잡변>을 통해 각각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정도전이 꿈꾼 사회는 '상식을 갖춘 백성(民)'이 그 중심에 서는 사회였다. 이는 당시 세계사적으로 볼 때도 혁신적인 변혁이었다. 물론, '민본사상'은 앞서 밝혔듯이 공자에 의해 인류사에 일찍이 출현한 것이다. 허나 그것을 실제적으로 사회에 제도로서 구현시키고 500년 이상을 지속시킨 사례는 거의 조선이 유일하다. 


  이방원에 의해 애초에 정도전이 수립한 수준의 강력한 신권의 구현은 좌절되었지만 신진사대부 세력의 정신 속에 남아 있는 '민본사상'에 대한 강력한 열망은 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덕분에 조선의 왕은 그 어느 군주국의 왕보다 신권의 감시 하에 놓이는 왕이 된다. <불씨잡변>은 사회의 커다란 변화를 이루어냈고 한민족의 샤머니즘은 사회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물러나고 예와 상식이라는 인문주의에 안방을 내주게 된다. 


  유럽을 중심에 둔 서양 사회의 왕에게는 백성을 돌본다는 의식이 희박했다. 그들에게 '왕의 자리'는 응당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이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이었으며, 백성들은 누구나 왕이 부릴 수 있는 신하이자 노예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동일한 피를 나눈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다. 그전에는 대게 전쟁을 통해 빼앗은 영토에 들어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중앙정치는 지방정치에 크게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국가제도라는 것의 수준은 겨우 조세제도나 군역제도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서양의 경우 이런 처절한 반민중적인 역사가 1000년 이상을 지속되었기 때문에 강렬한 인권의식의 성장, 피를 동반한 민중의 봉기가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처절한 민중억압의 암흑시대를 박차고 생겨난 것이다. 흔히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현대 민주주의 시초로 보지만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는 선택된 소수의 폴리스 시민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 민주주의이며 대표자를 뽑는 방식에 있어서도 제비 뽑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매우 낮은 단계의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한 모델 혹은 개념을 제공했다는 의의는 가질 수 있지만 '원조'라고 부르기는 민망한 것이다. 


  근대의 민주주의의 핵심은 '인권 존중'과 '권력 분립(소위 삼권 분립)'에 있다. '인권 존중'은 종교의 권위에 의해 인간의 권리를 마음대로 박탈할 수 있었던 중세에 대한 반발이다. 종교 재판 사회에서 법과 제도와 상식에 의한 재판 사회로 전환하는 것이다. '권력 분립'이란 영토를 지배한 강력한 지배자가 제멋대로 통치할 수 있었던 사회에서 모든 권력이 서로를 견제하며 누구도 마음대로 세상을 지배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서로의 잘못을 살피고 바로잡아야 할 책무를 가지는데 이 잘잘못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인권'이다. 


  이렇게 보면 묘하게 정도전이 개혁하려고 한 조선 사회의 그림과 서양의 근대가 겹쳐진다. 이것이 우리가 도식적으로 우리의 역사에 서양의 고-중-근 역사구조를 대입하면 안 되는 까닭이다.   


  정도전의 이상 사회는 비록 후기에 들어 지도층의 오판과 서로를 견제하는 장치의 균형성 상실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우리 사회에 심어놓은 인문 교육에 대한 열망과 백성이 중심이 되는 사상은 동학에까지 맥맥히 이어졌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와중에 더욱 단단해졌다. 결국, 대한민국 건국 이후 세계의 그 어떤 개발도상국보다도 빠른 민주주의 제도의 정착을 이룩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가 불과 50여년 만에 서양의 수 백년에 걸친 민주주의를 따라잡았다고 일컫지만 기실 그 저변의 의식은 우리가 되려 서양보다 빨랐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그 제도에 있어서는 서양의 양식을 - 대체로 미국의 양식을 - 따르고 있지만 그 사상의 기층에 있어서는 유교적 '민본사상'을 본으로 두고 있다. (1)부에서 말했듯이 서양의 '합리성'은 수학적인 합리성이다. 그에 반해 우리네의 합리성은 정서적인 요소를 상당 수 포함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분명 대통령제 국가에 살고 있지만 그 의식의 저변에서는 조선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어보인다. 대통령과 왕을 동일 시하는 정서가 여전히 민중의 기층 의식 속에 남겨져 있고, 법과 제도에 의한 심판에 앞서 '인지상정'을 우위에 두는 판단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북한 사회와 그 속의 민중을 보면 정확하게 조선왕조가 연장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듯이, 우리 민중에게도 그 정도는 매우 약화되었으나 여전히 정도전의 세계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정도전이 수립하고자 했던 도의는 대부문 망실된 채.  


  그럼, 이대로 가는 것이 좋을까. 우리는 여전히 심층의식 속에서 퇴락한 왕조의 백성으로 살아가도 좋은 것일까. 도올 선생은 <도올심득 동경대전 1>을 통해 다만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을 소개하며 책을 닫는다. 


  최수운은 남인계열 유학의 적통을 이어받아, 그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체계의 사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곧 '동학'이고, 동학은 '개벽'이라는 전면적 심성의 대전환을 통해 정도전이 도달하지 못한 '플레타르키아의 신세계'를 소망한다. 수운은 결코 공산주의자들처럼 폭력혁명을 통한 개혁을 말하지 않았다. 수운은 백성들 하나 하나가 스스로가 곧 '하늘'임을, 우리들 스스로가 곧 이 세계의 본(本)임을 깨닫는 데서부터 새로운 사회가 출현할 것이라고 설파한다. 이 세계의 주권이 통치자가 아니라 우리들 개개인에게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1863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151년이 지났다. 우리 사회는 지금 정도전이, 그리고 동학이 꿈꾸었던 그 사회에 조금은 가까워져 있는가. 우리는 이 세상의 주권자이며, 우리 삶의 주인이며, 천리(天理)를 - 혹은 정의를 - 실천하는 주체로서 살고 있는가. 글쎄, 나는 왜 부끄러워지는 걸까. 



2014. 2. 2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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