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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멀고느린구름 2014. 1. 5. 21:42


  

오후만 있던 일요일



  내내 비가 온다. 길 위로 엎질러진 네온이 흐른다. 꼭, 밟으면 신발 둘레에 알록달록하니 묻어날 것만 같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거리의 요란한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소리가 볼륨을 줄인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다 꽂는다. 이어폰 줄에 매달려 있는 리모컨을 이용해 음악을 켠다. 들국화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전인권 씨의 슬픔이 끓는 듯한 목소리가 차분한 투로 들려온다. 노래 마디마디에 빗줄기 소리가 새어들어왔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내렸네… 생각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일요일은 늘 오후만 있는 것 같애. 재현이 말했다. 음, 그런가? 재현이 피식 웃었다. 학교 도서실은 여전히 허술하게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익숙하게 문예부 쪽으로 나 있는 문을 통해 지금 이 도서실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재현과 나는 고등학교 같은 반 동창으로, 역시 같은 문예부였다. 도서실은 넓었고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노래를 불렀다. 창 밖 저편으로는 바다가 너울대고, 갈매기떼가 날았다. 


  너 이제 서울사람 다 됐다. 야, 그러는 너는. 우리는 피식 웃었다. 하늘에 뭉게구름들이 피어올랐다. 오랜만이지 참. 그러게 말이야. 우리는 서로 말 없이 도서실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마치 어딘가 앙금처럼 남아있을 추억을 찾기라도 하려는 듯이. 한참을 그러다가 약속이라도 한 양 창가로 다가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재현이 창문을 열었다. 촤악. 아련한 파도소리와 함께 바다내음을 풍기며 바람이 불어왔다. 길어진 재현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오늘이 기일이지? 알고 있었구나. 그러엄. 재현은 이윽이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저기야, 저 바다에 엄마가 있을 거야. 그래… 재현이의 아버지는 재현이가 1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그 후 재현을 혼자 보살피시던 어머니는 재현이가 고3이 되던 해에 바다 어딘가로 사라지셨다. 사람들의 얘기로는 태풍이 몰아치던 날 바다에서 재현이네 아버지의 환영을 보고 뛰어든 것이라고 했다. 끼륵끼륵. 갈매기떼가 울어대고 있었다. 하늘이 귤빛으로 물들어 갔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 보니 짙은 회색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재현이 노래를 불렀다. 서늘한 가을바다에 몸을 묻는 듯이 아득해졌다. 바람도 발 소리를 줄였다. 멀리서 노는 아이들 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밤과 낮의 경계에서 하늘은 조금씩 보라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스름이 차갑게 세상을 덮었다. 

  세상은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것은 아닌가봐. 응, 자리가 너무 좁아, 모두 사방이 낭떠러지인 조그만 원 위에 한 발로 위태위태 서 있는 거 같아. 하하, 넌 또 소설처럼 말하는 구나. 아직 나 꿈꾸는 소년이잖아 쿡쿡. 우리는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재현이는 아무래도 이번 학기는 휴학해야겠다며 사람 좋게 웃었다. 내일 모레 과에서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엠티를 끝으로 자신의 젊음은 막을 내릴 거라고... 몸이 좋지 않으신 할머니를 위해 돈을 좀 벌어야겠다고. 하늘은 쉬이 아물지 않을 듯 검게 멍들었다. 오늘의 밤은 이것으로 마지막. 내일은 또 내일의 밤이 올 것이다. 

  재현과 나는 끝내 그 도서실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발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또 그 빈 도서실에 무언가를 깜박 잃어버리고 두고 온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작용과 반작용 법칙이 지배했었다. 얻는 것 만큼 잃고, 사랑한 만큼 아파하고, 기쁜 만큼 슬퍼서 몸무게가 비슷한 두 사람이 탄 시소처럼 평평할 때가 있었다. 재현과 나는 어린 시절에 동네 놀이터의 공원에서 곧잘 시소를 타고 놀았었다. 그네처럼 하늘에 가까워질 수 있지만 그네처럼 외롭지는 않던 우리의 시소. 나는 시소를 타며 재현이 보는 만큼의 하늘을 보고, 재현의 머리카락이 닿는 만큼의 하늘에 내 머리도 닿았다.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즐거웠길래, 그렇게 저녁 해가 다 가도록 웃으며 시소를 탔을까.

  재현과 나는 학교를 빠져 나와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리 가자고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놀이터의 모래 알갱이들을 밟았고, 지독한 향수를 느끼며 시소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에 타볼까? 좋지. 우리는 아홉 살 꼬마로라도 돌아간 듯 깔깔거리며 시소를 탔다. 길어진 다리 덕분에 좀 엉거주춤 했지만, 우리는 번갈아 가며 같은 높이의 하늘과 세상을 느꼈다. 엉덩이가 알알했다. 요즘 애들은 그네를 더 좋아해. 재현이 그네쪽을 보며 말했다. 우리 때도 그네는 좋아했잖아. 우리와 다른 건, 옆의 아이 이름도 모르고 자기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거지. 어른이네...

  밤은 점점 깊어 가고 멀리 파도소리가 더욱 깊어지는 듯 했다. 우리는 놀이터를 나와 말없이 걸었고, 세상은 불빛으로 가득하고, 머리는 어지럽고 눈이 아팠다. 우리는 마땅히 돌아갈 곳이 없어 바다로 갔다. 그곳에서 재현이는 파도와 함께 울었다. 바다와 모래톱과 나와 재현의 까만 지붕에는 초생달이 걸려 있었다. 여리지만 초생달은 분명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헤어졌다.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사는 동안 다시 재현이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대로 어른이 되면, 우리는 다시 같은 하늘을 느낄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일요일의 밤은 또 끝나고 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내내 무언가 끝이 나는 걸 두려워 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의 하루는 매일 끝나고 있다. 지금의 이 일요일 오후가 내일이나 다음 주의 오후와는 같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것도, 꼭 간직하고픈 것도 어쩌면 오늘 하루와 함께 끝날지도 모른다. 여리고 약한 꽃들이 너무도 쉽게 지듯, 사람의 하루도 너무 쉽게 진다. 버스 사고를 당한 재현이에게는 나와 만났던 그 하루가 생의 끝이었다. 그건 어쩌면 나에게도 마찬가지. 

‘오후만 있던 일요일 포근한 밤이 왔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왔네…’

  노래가 끝난다. 하지만 테잎은 뒤집히고 다시 노래가 이어질 것이다. 길이 끝난다. 하지만 뒤돌아서면 다시 길은 시작될 것이다. 비가 그친다. 하지만 슬픈 생명들이 있는 한 비는 다시 내릴 것이다. 자정이 넘고 오늘 하루는 갔다. 하지만 시계 분침은 다시 절뚝절뚝 걸음을 옮긴다. 달은 죽은 영혼들이 모여 빛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나약한 나도 살아가다보면 언젠가는 스스로 달처럼 꽃처럼 빛을 낼 날이 올 것이다.

 

2002. 3. 3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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