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중력에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찬가
당신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자신이 태어난 고장의 이름을 말한다. 그렇게 말하자면 내 고향은 부산이다. 대한민국의 남동쪽 끝단, 바다를 곁에 두고 있는 마을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런데 질문자가 만약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당신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도 나는 모국인 '대한민국'을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차 묻는다면? '지구'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질문자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채 고개를 젓는다. 정말로 정말로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라고 다그친다.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곰곰이 생각했을 때 우리는 결국 이렇게 답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우주'에서 왔노라고.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신자라도 우리가 '우주'로부터 창조되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우주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그래비티>의 시작점은 묘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구에서 시작되지 않고 우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여성 주인공인 라이언에게는 지구에서의 삶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다. 지구에 남겨진 소중한 것들은 이미 그 가치를 잃었고, 필연적으로 지구로 돌아가야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흔한 스페이스 휴먼 드라마들처럼 지구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우주로 나왔다가 우주에서 고초를 겪고 다시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식의 이야기도 아니다.
우연한 사고로 우주 공간에 표류하게 된 라이언은 단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지구로 귀환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대체 왜 그녀는 살려고 하는 것일까. 그녀가 돌아가고자 하는 지구에 그녀를 반겨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오히려 우주 공간 속에서 잠드는 것이 더욱 편하고 쉬운 일인 텐데... 영화 <그래비티>는 그저 관객들에게 우주 유영이라는 가상 체험을 시켜주는 블록버스터급 놀이기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나는 '그래비티'라고 하는 제목에 주목했다. 어째서 이 영화의 제목을 '우주 탈출' 같은 평범한 이름이 아니라 '중력'이라고 하는 과학적 용어로 정한 것일까. 물리학적으로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는 네 가지 힘만이 존재한다. 중력, 전자기력, 강한 상호작용, 약한 상호작용. 이 네 가지다. 중력을 제외한 나머지 세 힘에는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존재한다. 즉, 끌어당기는 힘과 밀어내는 힘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허나, 중력에게는 끌어당기는 힘만이 존재한다. 중력을 제외한 다른 세 가지 힘은 우리 인간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힘이라기 보다는 미세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다. 인간이 직접 감각할 수 있는 힘은 중력이 유일하다. 중력은 거시적 세계에 드러나는 유일한 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자,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어째서 한 여성 과학자의 힘겨운 우주 탈출기에 '중력'이라는 다소 건조한 제목을 붙이게 된 것일까. 영화가 라이언의 탈출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영화는 라이언에게 끊임없이 이 질문을 던진다. 삶에서 모든 의미가 사라진 후에도 인간은 어째서 살아야만 하는가. 나는 며칠 전 퇴근길에 직장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큰 미련은 없을 것 같다고. 직장 동료는 놀라워 했다. 하지만 줄곧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다. 그저 지금 주어진 삶에 의미를 불어넣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 삶 그 자체 다시 말하자면 '생명' 그 자체를 유지시키는 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영화 <그래비티>에서 라이언은 '생명' 그 자체를 유지시키는 일을 매우 숭고한 목적으로 삼아 행동한다. 그리고 끝끝내 그 생명을 지켜내고 지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바다에서 육지로 힘겹게 기어 나오고, 바야흐로 직립보행에 성공하는 태초의 인간처럼 묘사된다. 그녀가 두 발로 대지에 서서 원시림에 덮인 지구를 바라볼 때 장엄한 음악이 흐르고 영화는 끝이난다. 나는 그 장면에서 주체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느꼈다. 아, 이것은 단순한 우주체험 시뮬레이션 영화가 아니구나. 내게 영화 <그래비티>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하여금 '생명의 시원' 그 자체를 간접 체험케 하는 영화로 다가왔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모든 생명체의 고향 우주는 갑작스런 팽창 '인플레이션'과 곧 이어진 대폭발 '빅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폭발은 물질과 물질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 그로 인해 우주는 지금도 최초의 서로로부터 끝없이 멀어지고 있는 중이다. 멀어진다는 것은 곧 서로를 배척한다는 것이며, 관계가 해체되고 끊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물질들이 서로 하나의 구심점을 가지고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모여있는 현상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약해지면 물질은 서로 멀어지고 흩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우주의 모든 '생명'은 중력으로부터 탄생되었다. 끝없이 멀어지고자 하는 물질들이 중력에 의해 한 곳으로 모여져, 별이 탄생했고, 그렇게 탄생한 별이 주변의 다른 별들을 자신의 주변으로 끌어당겨 은하계가 만들어지고, 서로 간의 물리적 질서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별들 속에서 또 입자와 입자, 물질과 물질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활동을 통해 '생명'이라고 이르는 것을 탄생시켰다. 영화 <그래비티>에서도 마찬가지다. 우주 공간에서 끌어당기는 힘은 라이언의 생명을 유지시킨다. 라이언이 우주정거장을 붙들고, 그것에 탑승할 수 있게 하는 모든 힘의 작용은 끌어당기는 힘이다. 라이언이 무엇이든 붙들고 그것을 자신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내지 않는 한 라이언은 영원한 암흑 속으로 밀려나고 만다. 라이언이 지구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 역시 지구의 중력 덕분이었다.
장중한 음악이 흐르며 영화의 스탭롤이 흐르는 동안 나는 135억년 전의 우주를 떠올려보았다. 영화 속 인공위성의 파편과도 같았을 초기의 입자들은 시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의 장구한 시간 동안 저 막막한 우주를 떠돌았을 것이다. 그러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입자들의 공동체를 만들게 되었을 것이다. '고독'이라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지만 만약 저 입자들에게도 '고독'과 같은 무엇이 있었다면... 입자들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 다음 그들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별을 이루고, 별들의 무리를 만들고, 자기들 속에서 살아갈 새로운 생명들을 탄생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은 참으로 절박하면서도 기쁘기 그지 없는 과업이 아니었을까. 창조주의 입장에서 내려다보더라도 자신이 탄생시킨 미세한 입자들이 서로의 힘으로 모여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장면들은 무척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생명'이란 그처럼 우리 들 인간 - 아주 짧은 세월을 살다 갈 뿐인 - 이 감각하기 힘든 긴 세월의 고독을 견디며 강하게 강하게 서로를 끌어 안아 이루어졌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본능 속에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이 의지는 저 광대한 우리의 고향 우주가 태초부터 우리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순간에도 우주는 흩어지려는 생명을 중력으로 온 힘을 기울여 붙잡아두고 있다. 우주 공간에서 자신의 목숨을 그만 놓으려는 라이언에게 지구는 지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중력이라는 더 큰 생명의 의지로 라이언을 지구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의지를 불어넣어준다.
나는 여태 내 조상이라고 부를 대상을 '인간'이라는 종으로 좁혀서 생각해왔다. 10만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 외에는 나와 관련 없는 별개의 생명체로 생각해온 것이다. 허나 영화 <그래비티>를 보고 극장을 나서며 아주 멀고 먼 생명의 조상들까지 떠올려보게 되었다. 어쩐지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 멀고 먼 조상들의 헤아릴 수조차 없는 고독의 댓가라고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가, 태양이, 그리고 우주의 중심이 이 거대한 세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중력이라는 힘으로 흩어지려는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우리들 인간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지키려는 것보다는 서로를 밀어내고, 상처 주려는 것에만 더 힘쓰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은 역시 틀렸다. 우리가 우주로부터 배워야할 것이 더 많다.
2013. 12. 1. 멀고느린구름
'산문 >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게임들 - 드래곤퀘스트 (0) | 2013.12.11 |
---|---|
나쓰메 소세키 - 한눈팔기 / 우리는 근대를 벗어났을까 (0) | 2013.12.08 |
황현산 - 밤이 선생이다 / 밤의 선생을 기다리며 (0) | 2013.11.24 |
훌리오 메뎀 - 북극의 연인들 / 내가 당신이라고 해도, 당신이 나라고 해도 (0) | 2013.11.11 |
무라카미 하루키 - 이윽고 슬픈 외국어 / 쓰지 않아도 그만일 이야기의 필요성(반디 & View 어워드 선정) (2) | 2013.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