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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슬픈 외국어 - 8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문학사상사



쓰지 않아도 그만일 이야기의 필요성 



언제나 글을 쓰기 전에 느끼는 것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책 리뷰를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책 리뷰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읽은 책에서 받은 감명을 기록한다는 1차적인 의미도 있지만 이렇게 반 공개된 장소에서 '굳이' 특정한 책을 읽은 감상기를 남긴다는 것은 그 책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함의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을 널리 알리려는 행위가 되고 말아서 사실 별 소용이 없는 짓이 되고 만다. 친절한 출판사 편집부로부터 쓰지 않아도 그만일 이야기따위는 그만 써도 좋습니다 라고 이메일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구태여 이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결국 '쓰고 싶어서'이다. 


처음 "글을 써야겠어!" 라고 마음 먹고 자기만의 글 목록을 쌓아가다 보면 어디 쯤에선가는 반드시 "난 대체 왜 쓰고 있는 거지?"라는 물음과 만나게 된다. - 나는 만나지 않았는데? 라고 항변하고 싶다면... 우선, 그 녀석을 만날 때까지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 내가 그 질문을 만나게 된 시점은 글을 쓰기 시작하고 4년 정도가 지난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연거푸 청소년 소설 공모전이나 백일장 등에서 낙방하고 지쳐 있을 즈음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 집필의 역사에서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었는가 싶다. 예민하지만 한편 단순하기 짝이 없는 성격의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냥 에이 쓰고 싶으니까 싫증 안 날 때까지 쓰는 거지 머! 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껏 싫증 내지 않고 잘 써오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임에도  상당히 탁월한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글은 전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또 한편 많은 이들에게 경시의 대상도 되고 있는 듯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지만 대체로 중론을 모아보면 대체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 듯하다. 오늘 리뷰하고자 하는 <이윽고 슬픈 외국어> 역시 솔직히 말하자면 어딘가 특별히 소용이 있는 책은 아니다. 대체로 쓸 데 없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딱히 어느 부분을 포인트로 삼아서 리뷰를 해야할지도 곤란하다. 고매한 교양을 쌓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책은 B급 도서의 목록에 포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삶 전체를 두고 보면 우리의 삶은 대부분 쓸 데 없는 것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아마도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어림잡아 통계를 내어보면 인생의 1% 정도만이 유익한, 혹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또는 매우 고상한 요소일 것이다. 그 외에 대부분은 아몬드가 듬뿍 담긴 아이스크림을 떠먹는다던가, 음반가게에서 희귀 음반을 발견하고 감격한다던가, 지나가는 여자아이의 미모에 넋을 잃는다던가 하는 일들이 인생이란 카테고리를 채우고 있지 않겠나. 좀 더 나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인간은 아몬드 아이스크림을 떠먹는 일보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의 존재 증명을 어떻게 했는지가 더 궁금한 법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윽고 슬픈 외국어>라는 제목에서도 하루키가 미국에서 체류하며 사고한 언어학적 식견 또는, '영어'라고 하는, 이미 국제어의 지위를 획득해버린 이 특수한 '언어'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비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하루키 씨는 '난 그런 방면에선 문외한이니까' 라며 가볍게 넘어가고 만다. 그대신 어느 나라에 가든지 똑같이 하고 있을 뿐인 '달리기'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거나,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들의 패션 유형, 미국에서 마음에 드는 이발소를 찾느라 고생한 이야기 같은 것을 늘어놓고 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를 무리 없이 쓰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대작가'라고 소개하는 언론의 미사여구에 혹해 책을 접어든 학구파 독자들은 어디가 대작가라는 거야! 라며 출판사 홈페이지에 조직적으로 합법 항의 댓글을 달고 있을지도 모른다. - 내가 알기로 하루키 씨는 스스로 대작가라고 칭한 적은 없어보이니 본인에게 직접 일본어(혹은 영어)로 메일을 보내는 일은 할 필요가 없겠다. -  분명히 말하지만 영어에 관한 언어학적 식견을 얻고 싶은 독자라면 소쉬르나 촘스키, 에코의 책을 읽는 것이 골백번 고쳐 죽어도 나을 것이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그림을 감상하기에 좋은 책이다. 그의 귀여운 그림에 반했다면 아마도 이 책을 선택해도 좋다.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체에 딱 어울릴 법한 글들이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가끔씩 그림체의 범위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하루키 씨의 식견에 소소한 감탄을 일으키면 족하다. 대체로 학문에 뜻을 품은 이, 혹은 이 사회를 변혁시켜 보아야겠다는 야망을 품은 이들일 수록 앞서 언급한 1%의 이야기, 지식에 집중한다. 그 1%는 분명 우리 삶에서 가장 의미 있고, 가장 필요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엇일지도 모른다. 허나 반대의 경우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삶의 99%는 그것 외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것을 잊지 않는 작가다. 그리고 그 99%의 것을 가장 근사하게 그려낼 수 있는 작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쓰면서 아무렇지만은 않은 것으로 바꾸어 놓는 기묘한 능력을 지닌 작가다. 게다가 나로 하여금 이런 쓸모 없는 책리뷰를 쓰게 만들기도 한다. 과연, 당대의 대작가란 이런 것이다. 

  


2013. 11. 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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