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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고양이가 있었다 3

멀고느린구름 2012. 12. 5. 22:45





집과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서는 갖가지 이름의 생수를 팔았지만 보리차는 팔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옷깃을 여미고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슈퍼마켓까지 걸었다. 걷는 도중 진눈깨비를 맞았다. 첫눈이라면 첫눈이라고 할 수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보았다. 새벽 5시 36분. 시계를 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친구는 마지막 힘을 다해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을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새벽 5시 39분에 문을 열고 있을 슈퍼마켓은 없다. 아마도 없을 것이었다. 소득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진눈깨비는 등과 어깨 이마, 볼, 입술, 손등과 손가락 마디에까지 내려앉았다가 이내 홀연히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도깨비 같은 눈이라서 진눈깨비라고 했을까. 안개 속에서 귤빛 헤드라이트가 길게 뻗어나와 차도를 더듬고 다니기 시작했다. 생수를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3



 서울에 올라와 이화동에서 혼자 살고 있는 엄마를 찾아갔다. 가파른 비탈길을 끙끙거리며 올라가면 사방이 시멘트로 둘러싸인 좁은 골목이 나왔고 미로 같은 길을 구불구불 헤매다보면 엄마가 분홍색으로 칠해놓은 철문이 보였다. 5년 동안 혜화역 바닥의 껌을 떼고, 화장실의 토사물을 치우고,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를 닦고, 지하철 공무원과 공익근무요원의 쓰레기통을 비워 온 엄마였다. 지난 달 부로 지하철 공사가 거대 용역회사와 계약을 맺으면서 정리해고를 당해 현재 여기저기 구직 중이었다. 


“좀 쉬어도 괜찮다니까요.”

“됐다 마. 내가 쉬면 뭐하노.”


엄마는 몇 달 동안은 생활비를 대줄 수 있으니 푹 쉬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더 닥달을 해볼까 싶다가 그만두었다. 티비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화면을 주시하고 있는 엄마의 완고한 목선이, 하얀 피부 위로 도드라진 푸르스름한 실핏줄이, 그 옛날 병실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짐짓 평온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엄마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아침 드라마 같은 대사를 내뱉었었다. 엄마 같이 살지마 절대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었다.  


“애인은 잘 만나나?”

“그냥 뭐...”


 엄마의 질문보다는 엄마가 보고 있던 티비 화면에 더 신경이 갔다. 그저께 새벽에 보았던 고양이 구조 프로그램의 후편이었다. 


“엄마...”

“응?”

“아냐.”

“와?”

“아냐...”

“와 뭔 일 있나? 애인이 잘 몬해주나?”

“아냐...”


엄마에게 헤이리에서 본 아기 고양이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엄마는 쓸쓸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걱정된다기보다 자기의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아 주지 않는 딸에 대한 섭섭함에 쓸쓸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다 엄마와 시시콜콜한 고민을 공유하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외려 비율을 따지면 그렇지 않은 쪽이 많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늘 ‘진짜 딸’을 가지지 못했다는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엄마와 내가 다시 만나기까지는 10년이 걸렸고, 그 사이에 우리는 분명 모녀가 아니었다. 


고양이 구조 프로그램 후편을 함께 끝까지 시청한 후 엄마와 나는 분홍색 철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잿빛 털을 지닌 고양이 한 마리가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멀리로 달아났다. 충분히 거리를 둔 다음 멈춰서서 이쪽을 응시했다. 손을 흔들어주었다. 잿빛 고양이는 고개를 몇 번 갸우뚱거리더니 도도한 걸음으로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엄마와 팔짱을 끼고 가파른 비탈길을 다시 내려갔다. 평일에도 북적거리는 대학로 거리를 지나 병원으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속이 자꾸 쓰리고 뭘 먹어도 역겹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함께 병원에 가보기로 한 것이었다. 특별히 불길한 예감은 들지 않았다. 그저 약 처방을 위한 진단서를 끊는 김에 함께 종합검진도 한 번 받아보자는 계획이었다. 검사를 마치고 의사는 엄마와 나를 굳이 따로 불러서 진단 결과를 알려줬다. 엄마가 먼저였고, 내가 다음이었다. 엄마는 진단결과를 듣고 돌아오며 대기석에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멀리서부터 외쳤다. 


“봐라, 별 꺼 아이란다이가. 스트레스 때문이란다. 약 지어무면 다 낫는단다.”


엄마의 표정이 환했다. 내심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의사가 나를 불렀다. 갑자기 무거운 돌이 배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2012. 12. 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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