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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7일 - 다섯째 날

멀고느린구름 2012. 1. 30. 10:09



다섯째 날



   사랑하는 딸아, 다시 날이 밝았다. 그리고 아빠는 아직 살아 있구나. 다행이다. 신은 아직 내게 이 이야기를 끝마칠 기회를 주려는 것 같다. 그래, 끝마쳐야겠지. 나는 지금 어제와는 다른 숙소에 있다. 창을 열면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야. 오늘 아침 일찍 동해로 옮겨 왔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었다. 이 해변은 네 엄마와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네 엄마가 한 번 와보고는 반해서 여름이 될 때마다 오자고 조르던 곳이란다. 하지만 네 엄마와 오기 전에는 그 사람과 처음 이곳에 왔었다. 


   딸아,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안다. 아냐, 그래.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경멸하게 되었다는 것을. 사랑하던 이의 타락과 추악은 무엇보다 깊은 상처를 남기는 법이지. 네가 노동운동을 하면서 목격하게 된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삶, 그리고 그들을 억압하는 것들의 모호한 실체. 이런 것들을 너는 아마 고민했을 거다. 그리고 알게 되었겠지. 바로 네가 사랑했던 아빠가 그들을 더럽힌 장본인이라는 걸. 악덕 자본가의 표본이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너 자신은 그런 이가 부정하게 축적한 돈으로 일신을 가꾸며 살아왔다는 것을. 너 자신에게로 향했던 혐오의 화살은 결국 너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무의식에게 막혀, 바로 나를 향하게 되었을 거다. 그리 되었을 거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너의 변심은 나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구나.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상처 입히는 날들이 이어졌다. 내게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나에게 죄가 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네가 가진 것을 감사히 여길 줄 모르는 것이라고.. 나는 모두 너를 위해 나 자신을 희생시켜온 사람이라고 되뇌곤 했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너는 이 아빠를 더욱 더 경멸하고 멸시하고 혐오했다. 


  그런 네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 - 네 엄마 외에 더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는 둥 - 이 끝끝내 나에 대한 혐오의 항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리될 공산이 크겠지. 그럼에도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네가 사람살이의 모순과 사람이 지닌 마음의 한계라는 것에 대해… 그 마음이라는 것의 지극히 협소한 공간에 대해… 이해할 날이 온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그것만을 바라 이 글을 남기고 있는 거다. 그러니 딸아, 이 글을 읽다가 중도에 그만 두어도 좋다. 하지만 찢어버리거나 불태워버리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그냥 서랍 어딘가 접어서 넣어두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좀 더, 좀 더 세월이 지난 다음에 한 번만 더 다시 읽어주면 좋겠다. 아빠의 유언이다. 그리 해주길 염원한다. 


   늦여름의 바다는 마지막으로 여름바다의 촉감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숙소를 구하는 데도 꽤 애를 먹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정도만 지나도 거짓말처럼 이 바다는 황량해질 거야. 이 바다는 행복한 사람들의 것이 아닌, 불행한 사람들의 것이 되겠지. 죽음이든, 변심이든, 혹 타인의 강압에 의해서든, 어떤 이유에서든 이별한 사람들이 이 바다를 찾을 거다. 그리고 해변을 거닐며 꿈 같은 여름의 밤을 떠올리겠지. 그렇지만 나처럼 가을바다의 추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떨까. 마찬가지다. 필시 혼자 이 바다를 다시 찾을 때는 그 추억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과의 기억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그 사람과는 다시 만날 수 없다. 살아서는 말이야. 살아서는. 


   1970년 가을, 나는 그 사람과 더 없이 행복했다. ‘행복'이란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니. 나는 알고 있단다. 분명히 이 몸에 새겨져 있지. 네 번째, 다섯 번째 그 사람과 만나 우리는 온종일 서로의 모든 기억을 나누었다. 그 사람이 어린 시절 국민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던 길에 커다란 해바라기 밭을 발견하고는, 남몰래 가장 커다란 해바라기 하나를 꺾어들고 집으로 달음질을 쳤던 것도 들었다. 그 사람은 그 한 번의 도둑질이 평생 마음에 생채기로 남았다고 하더구나. 그 해바라기는 이제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다고 했어. 선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렇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는데도 무시로 이것저것을 훔치곤 했다. 행여 들키더라도 네 할아버지가 돈을 물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사실, 훔쳤다기 보다는 그저 가져왔던 거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문방구나 슈퍼에서 아무렇게 물건을 집어 가도 누구 하나 무어라 야단 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내게 그 사람의 그 해바라기 도둑질 이야기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여섯 번째 만남은 그 사람이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질 않아 유보되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사람의 집으로 연락했지만 받지를 않았다. 한 주 뒤에 다시 약속장소로 나갔더니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그 사람 어머니의 유골함이 들려 있었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장례까지 다 치뤘다는 거였다. 그 사람은 울지도 않고 씩씩하게 내게 경과를 다 이야기하는 게 아니냐. 지난 주에 나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하더구나. 당치 않다고 손사레를 쳤다. 그 사람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바다로 배를 타고 떠나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뱃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이제 막 걸음을 시작할 무렵, 아버지는 배를 타고 떠나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람의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묻히길 원했다는구나. 우리는 어머니의 유골함을 가지고 동해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10월 중순이어서 날씨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날은 또 유난히 바람이 찼다. 


  그 사람과 나는 그날 이 바다 앞에 와서 그 사람 어머니의 유골을 뿌렸다. 다행히 바람이 바다로 불었다. 그 사람의 어머니는 아주 먼 바다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원하던 것처럼 사랑하던 이를 만나셨을까. 저승에서는 나도 그리운 사람들을 모두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일까. 그랬으면 참 좋겠구나. 


  어머니의 유골을 모두 뿌리고 나자, 그 사람은 천애고아가 되어버렸다. 그제서야 그 사람은 모래톱 위에 무너져 내려 목놓아 울더구나. 아무런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등을 쓸어주는 것밖에. 한 시간 가량을 울고나서야 그 사람은 울음을 그쳤다. 기력이 쇠해 잘 걸을 수도 없었다. 날은 추웠다. 우리는 가까운 여관방에 들었다. 그 사람은 이내 내 품 속에서 잠이 들었다. 아빠는 젊은 혈기가 넘쳤지만 그 사람을 범하지는 않았어. 지켜주리라고 마음 먹었다. 오래오래. 가능하면 영원히. 그 사람은 다음 날 아침까지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 사람이 내게 처음으로 건낸 말이 ‘사랑해요'였다. 그 사람의 마음 전체가, 아니 삶 전체가 내 속으로 건너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가족들의 반대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 모든 것을 버리게 되더라도 그 사람과 함께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만나던 날. 나는 그 사람에게 청혼할 반지를 외투 안주머니에 품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딸아, 이 다음 이야기를 쓰는 데에는 좀 더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 무리해서 해변을 걸은 탓인지 몸 상태가 좋지 않구나. 다음 이야기는 내일 했으면 좋겠다. 할 수 있겠지. 아직은 내게 시간이 남은 것 같다. 괜찮을 거다. 혹, 이 아빠를 걱정하고 있다면 -고맙구나- 너무 걱정 말거라. 괜찮다. 나는 지금 홀가분하다. 내일이면 어쩌면 오랜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라도 읽어주었다면 정말 고맙다. 정말 고맙다. 



2012. 1. 3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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