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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 시간에 이와 같은 제목의 글을 쓰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가 하는 질문은 잠시 뒤로 하자. 권도원 선생의 8체질 의학에 의거하여 분류하자면 수양(水暘) 체질에 해당하는 나는 화장실에 장기간 체류할 수밖에 없는 운을 타고 났다. 덕분에 화장실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유년시절부터 화장실에 갈 적이면 만화책이든 뭐든 손에 읽을 거리를 항상 가지고 갔다. 그 습관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헌데 이 것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변의를 느끼고 화장실에 달려가야 할 때면 대체로 촌각을 다투는 위급상황일 경우일 텐데 이 때에도 나는 항상 어떤 책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 살피는 것은 언제나 소설 코너이다. 장편을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읽어낼 정도의 심각한 질병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살펴보는 것은 역시 단편집 쪽이다. 그렇다고 변기에 앉아 도스토예프스키나 제임스 조이스 등을 읽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기 때문에 대체로 오 헨리나 에드가 알렌 포, 모파상 그리고 최근에는 레이먼드 카버 등의 단편집을 만지작 거린다. 국내 작가로는 김영하, 김중혁, 이상 등에 손길이 간다.

  그렇게 몇 권을 뒤적거리다 보면 좀처럼 변기 위에 앉아 소화해내기는 어렵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되고, 이내 책장의 소설 코너를 벗어나 수필 코너에 선다. 이해인, 법정, 이외수, 피천득, 류시화, 루이제 린저 등을 들추다가 결국에는 잡지 코너로 옮겨 가고 잡지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몇몇 인상적인 사진이나 제품에 이끌려 한 참을 쳐다보게 되고 만다. 그러다보면 한층 강도 높은 하부의 파도가 밀려오게 되고 내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어찌 하다보면 결국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눈으로만 보아 넘길 수 있는 사진집 류이다. 최근 한 달간은 거의 배두나 씨의 '놀이 시리즈'가 손에 들려 있었다. - 이거 뭔가 굉장히 두나 씨에게는 실례가 되는 일 같지만 - 

  오늘 아침은 다행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이 손에 들려 있었다. 허나 그 책을 선택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수 십권을 들춰보다가 긴박해진 나머지 소파 위에 놓아두었던 <잡문집>을 발견하고 주워 든 것뿐이었다. 만약 <잡문집>이 눈에 확 띄는 형광빛 주황색이 아니라 보라색이나 짙은 녹색이었다면 간택 되지 못했으리라.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화장실에 가지고 갈 책을 랜덤으로 선택해주는 기계' 같은 것을 개발하는 것이다. 기계의 빨간 버튼(반드시 빨간색이어야 한다.)을 누르면 기계에 저장된 도서 목록 중에서 랜덤으로 한 권을 선택해 디스플레이에 표현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암묵적 합의에 따라 군말 없이 서가에서 그 책을 뽑아들고 묵묵히 화장실로 향하는 것이다. 물론 자연스럽게 그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화장실에 가지고 갈 책을 랜덤으로 선택해주는 기계'와 나 사이의 돈독한 신뢰관계가 우선 구축되어야 하겠지만. 그런 일은 우선 우리가 상견례를 하고 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니까 생각을 뒤로 미뤄두기로 하자. 

  누군가 기계공학 쪽에 탁월한 재능이 있으며, 가난한 아마추어 예술가를 후원해주려는 열의에 차 있다면 '화장실에 가지고 갈 책을 랜덤으로 선택해주는 기계'의 개발을 조심스럽게 제안해드리고 싶다. 제안에 응한 분과 적절한 협의가 된다면 이 아이디어를 무상으로 제공해줄 용의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모쪼록 조속한 시일 내에 이 미개척지에 뛰어들 용기 있는 청년 엔지니어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배두나 씨에게는 다시 한 번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 


2012. 1. 7. 점심시간에.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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