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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 지구, 그리고 우주 


 사람의 생이란 저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고, 137억년이라는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아주 잠시 머물다 가는 것에 불과한 순간 동안 인간이 과연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가 근원적인 회의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단란한 가정의 구성원이 되어, 일정 수준의 연봉을 받으며 무리 없이 살아나가기를 기대하고, 어떤 사람은 대권에 도전하는 인생을 꿈꾸며, 또 어떤 이는 재계의 거물이 되기를 욕망한다. 각자 이 사회, 또는 국가, 나아가 세계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며 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관에 따르자면 인간은 스스로 태어날 장소와 태어날 시기, 태어날 부모를 선택해서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그 태어남에는 반드시 미리 정해둔 목적이다고 본다. 이러한 세계관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체로키 부족 등의 전통을 살펴보면 13살이 된 아이는 혼자 들판이나 숲으로 나아가 이른 바 '비전 퀘스트'라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 이것은 '위대한 신비'로부터 그 아이가 이 지구에 태어나게 된 이유를 듣는 의식이다. 아이는 '위대한 신비'가 자신에게 삶의 이유를 알려줄 때까지 며칠이고 금식을 하며 명상을 한다. 전통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든 아이들은 이 의식을 거쳐 성인이 되었고, 성인이 된 아이들은 명확한 인생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평균 90살 이상까지 연장 된다면 나는 벌써 인생의 3분의 1을 살아버린 셈이다. 이 즈음 해서 나 자신의 비전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늦은 밤 이 글을 써내려 간다. 

  나는 어릴적부터 이사와 전학을 많이 다닌 탓에 곁에 친구가 별로 없었고, 덕분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혼자 있을 때는 숲이나 산에 들어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거나,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무료하게 바라보는 것이 낙이었다.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어쩌다보니 자연에 가깝게 자라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에 대한 책들을 접하게 되었고, 중학생이라는 이른 나이 때부터 전통적인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숲 속에서 혼자 나만의 '비전 퀘스트'를 치렀다. 내게 주어진 계시는 '지구에 도움이 되는 삶'이었다. 중학생 시절에는 그것이 명확하게 문장으로 정리되지는 않았다. 그건 일종의 막연한 느낌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우주 속에서 지구의 의미라든가, 지구 자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생태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학생 시절 나의 화두는 크게 두 가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나는 우주는 왜 생겨났는가. 또 하나는 세계는 어째서 불공평한가 였다. 첫 번째 화두를 해결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날마다 물리학과 천문학 서적을 꺼내 읽었고, 두 번째 화두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친구를 만났는데, 그것이 바로 문학이었고 정확히 하자면 '소설'이었다. '소설'은 나에게 하나의 우주를 창조하는 가장 경제적인 예술이었다. 가난했던 나에게 단지 샤프 한 자루만 있으면 우주의 최초부터 우주의 끝까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소설'은 경이로운 최고의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처음 소설을 썼던 중학교 2학년 겨울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계속 소설을 쓰고 있다. 이 친구는 앞으로도 나와 평생을 함께할 베스트 프랜드다.

  고등학생 시절 나의 고민은 좀 더 깊어졌다. 우주에 대한 고민은 종교와 심리학으로 자연히 연계되었고, 나는 인간의 마음을 탐구했다. 한 편으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에 대한 연구도 병행했다.

  자고로 싯다르타(부처)는 '불가지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우주론을 쿨하게 정리해버렸다. '모르겠다'는 거다. 인간은 우주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실 그 전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결국 모두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분일 뿐이며, 그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면, 우리 역시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근원적인 까닭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김이 새는 말이겠지만, 나 역시 모르겠다. 지금에서는 나 또한, 근원적으로 인간이 이 우주에 포함된 존재인 이상 그 보다 훨씬 더 거대한 단위인 우주의 존재 이유는 알아낼 도리가 없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다만, 인간은 어떤 필요에 의해 이 우주의 운행에 봉사하고 있다고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을 따름이다. 

  분명,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적인 존재들은 우주 자체의 유지를 위해 일정부분 봉사를 하고 있으며, 우주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그 존재들을 생성하거나 소거한다. 그렇다면 '우주'란, 흔히 생각하듯 어떠한 독립적인 지성을 지닌 '신'일까? 스티븐 호킹과 리쳐드 파인만 등 양자 물리학자들은 그러한 관점을 반박하는여러 증거들을 발표해왔다. 양자론에 의하면 이 세계의 모든 최소 입자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정보를 공유한다. 우주란 이 입자들의 집합체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란 무수한 작은생각들, 혹은 마음들의 거대한 집합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우주의 여러 요소들 중, 그 '생각'이란 부분이 특화되어 발달된 종이다. 모든 물질들이 '정보'를 지니고 있고, 일부의 동물들은 '마음' 또한 지니고 있지만, 특정한 '방향성을 지닌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인간 밖에 없다는 것이 여러 종교 지도자, 명상가들의 중론이다. 유수한 천문학자들도 아직까지 인간 외의 우주 속에 있을 지적인 종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지껏 '밝혀진 정보'만을 놓고 보자면 이 우주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물론 태양계 외의 수억계에 달하는 은하계에 '인간과 유사한 종'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고, 그들 또한 우주의 방향성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인간이 우주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야기를 진행하다보니 은하계의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는데, 사람에게는 각자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정의 문제를 고민하고 그 범주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정치적 운동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활동가가 있을 수 있다. 무엇이 더 상급이냐? 는 질문은 재미 있는 질문이지만, 크게 의미 있는 질문은 아니다. 각자의 역할이 다를 뿐이다. 스티븐 호킹이 반드시 스티브 잡스보다 위대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2. 세계의 혁명이냐 마음의 혁명이냐, 정치와 종교의 문제.  

  앞 서 '나는 지구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비전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비전을 앞의 표현과 같은 구체적인 문장으로 정리한 것은 20대 중반이 되어서였다. 그 전까지 나는 주로 생태운동과 공평한 세계를 만드는 운동에 참여하고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흔히들 하이데거의 생각을 인용해 말하곤 하지만 실제의 인간의 삶과 역사의 궤적을 따져보면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나는 말한다. 인간의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다만 되풀이 될 뿐이다. 우리가 현재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체제는 기원전 국가에서 유래된 것이며, 단지 몇 천년간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나 있다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과학 이론이라는 것들도 사실 새로운 것이 없다. 모두 희랍의 사상가들이 한 번쯤 거론했던 이야기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이야기는 기원전 3000년 경에도 등장한다. 원자 등의 최소 입자 이야기도 모두 수 천년 전 과거에 존재했던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은 중세의 암흑기를 지나고 마녀사냥을 견딘 후, 17세기가 되어 다시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부활하는 것은 예수만이 아니다. '지능'을 가진 인간의 탄생은 무려 수 만년 전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단지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모를 뿐이다. 정반합을 통해서 인류의 역사가 나선형으로 발전해 간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저 '발전'이라는 단어가 어색하다. 인간의 역사란 단지 과거와 '달라지고 있을 뿐'이다. '발전'이라는 것은 지극히 해석의 문제일 뿐이다. 누구의 관점에서 '발전'인가. 지구는 자기 속에서 태어난 인류가 '발전'하고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는 꾸준히 지구를 황폐화하는 방향으로 퇴보해왔다. 그리고 근대 이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 방향성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21세기는 그 중요한 전환점이다. 인류가 다시 방향성을 수정하느냐, 기존의 방향을 고수하느냐가 판가름 나는 시기라고 본다. 나는 이 순간, '모종의 아주 작은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싯다르타는 2555년전 태어나 불교를 통해 인간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려 했고, 예수는 조금 더 늦게 태어나 싯다르타와 동일한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쯤 인류 모두가 싯다르타나 예수와 같은 인물이 되었어도 좋았으리라. 그러나 인류의 구성원 중 5% 정도의 사람만이 그들에 가까워졌거나,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뿐이다. 2555년 전보다 인류 비율에서 불교 인구가 늘었다는 증거는 없다. 진정한 의미의 개신교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한 때 마음의 혁명에 경도되었으나 그 방식으로는 획기적인 전환을 이룰 수 없다. 물론 마음의 혁명이 가장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18세기 프랑스 시민 혁명을 통해 인류는 중요한 정치적 변혁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 도처에서여전히 진행 중이다. 정치혁명은 종교를 통한 혁명보다 훨씬 더 단기간에 인류를 변화시켰다. 불과 3세기만에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인류는 수 천년간을 지속해오던 삶의 방식을 몇 백년만에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정치의 힘이다. 정치는 단기 속성 과정과도 같다. 그러나 단기 속성은 늘 부작용을 가지고 온다. 부실공사다. 그로 인해 우리는 독재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의 폐해를 겪었고, 오늘날에는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으로의 심각한 예속현상을 겪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역시 마음의 혁명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하게 포장만을 바꿔치려 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과거의 교훈들로 볼 때 인류가 획기적이면서도 진정한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혁명을 이룬 이들에 의해 주도되는 정치적 혁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비대중적인 행위다.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답을 알았지만 풀어내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 이 문제는 여전히 내게도 숙제로 남아 있다. 



3. 나는 왜, 어떤 방법으로 지구를 도우려 하는가?

  서론에서 밝혔듯이 인간이란 우주의 역사에서 아주 찰나의 순간만을 빛내다 스러지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냥 주어진 짧은 생을 재밌게 즐기다 가면 그만이지 무슨 지구를 돕네 어쩌구 하는 거창한 소리를 나는 지껄이고 있는가. 사실, 그 질문은 나로서도 대답하기가 까다로운 것이 사실이다. 단지 내게 주어진 '소명의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의 세계관에서는 모든 생명은 한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윤회하며 반영구적인 시공을 점유하는 존재다. 나 역시 1981년부터 지금까지라는 짧은 인생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 광막한 우주가 탄생했을 시점부터 어딘가에 어떠한 최소입자로 존재했고 앞으로도 또 다른 어떤 모습으로든 변화하며 살아가게 될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우주라는 거대한 시공 속에서 이번 생을 통해 '지구를 돕는 삶'을 살기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니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을 묵묵히 실천할 따름이다. 

  나는 내가 신의 부름을 받은 신탁자라든가, 위대한 존재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구를 돕는 일에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다. 아주 미약한 들러리라도 상관 없다. 다만 내 역할에 충실하고자 할 뿐이다. 

  30년간의 꾸준한 연구 끝에 내가 선택한 지구를 돕는 방법은 '교육'을 접목한 방법이다. 교육이라면 '계몽'을 하거나 '설득'을 한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나는 교육을 '보여주기'라고 생각한다.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강요도, 설득도 아니다. 보여주기다.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이 먼저 훌륭해지면 된다. 아이를 예술적인 자질이 충만하게 키우고 싶다면 스스로 예술가가 되면 된다. 나는 대안교육을 통해 이 방식을 활용했고, 어느 정도 확신을 얻었다. 

  지구를 획기적으로 돕는 일은 환경운동이라든지, 환경교육이라든지, 환경영화를 제작해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지금 지구의 문제는 단순히 환경이나 생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가치의 문제고, 인류 문화 전반의 문제이며, 곧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어온 인류의 삶의 모델을 완전히 뒤흔들지 못하면 시간이 모든 것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버리고 말 것이다. 

  레닌이라면 폭력을 동반한 혁명을 주창했겠지만, 그것은 역사 속에서 명백한 한계를 드러냈다. 그러므로 나는 비폭력에 입각해 인류를 유혹할 모델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지구를 도우려고 한다. 나 스스로가 가장 지구적인 삶의 모델이 되어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재능을 통해그 방식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자 한다.

'소설'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돌아보게 할 것이다. '강연'은 방향을 제시하고 생각을 흔들 것이다. 그리고 '논문'은 대안을 제시할 것이다. 소설쓰기 - 강연 - 논문. 이 세가지의 방식을 통해 지구를 돕는 방식의 삶을 홍보할 것이다. 방송과 뉴미디어 역시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나 스스로 그 삶의 최일선의 모델이 되고자 한다. 적절한 채식주의와 자급자족 방식의 소농 활동을 병행하는 삶, 진보적 여성주의에 입각한 관계맺음, 비폭력, 자립, 창조, 생산수단을 스스로 가지는 것, 소규모 공동체간의 네트워크와 국가 권력의 균형,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대안 경제, 아직 명확히 구체화되지 않은 키워드들을 하나씩 구체화해 가며 50대 즈음에는 완성된 하나의  삶의 모델을 창출하려 한다. 이 모든 일들은 나 혼자만이 아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통해 수행해 나가고 싶다. 이미 많은 선배들이 나보다 먼저 유사한 일들을 해왔고, 이루어 왔다. 나는 그것들을 좀 더 극적으로 홍보하고, 부족한 점들을 보완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자 한다. 이 쪽이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그러니 당신도 함께 해보지겠느냐고. 함께 춤을 추자고. 


4. 미래는 모두에게 불투명하고 허황된 것.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하는 것.  


    뉴튼의 물리학 세계에서 시간은 과거 - 현재 - 미래로 나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에 와서는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다. 시간은 공간에 가해진 중력에 의해 휘어져 있는 것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선후 관계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인도의 윤회 사상 속에서도 인간의 윤회란 반드시 미래만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님이 발견된다. 인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윤회하기도 한다. 2011년에 죽은 사람이 반드시 100년 후인 2111년에 환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1911년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에 의해 생겨난 평행우주론은 우리가 사는 우주가 무수한 가능성으로 열린 다 차원의 복잡한, 무한히 열린 세계라고 말한다. 내가 만들어 가고자 하는 지구의 방향성 역시, 그 무수한 가능성의 우주 중 하나의 가능태에 불과하다. 

  최근 '시크릿'이라는 책이 유행을 했다. 그 책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생각하라. 요구하라.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최신 인지과학과 뇌과학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단 한 번의 생각을 할 때마다 인간의 뇌에서는 전기가 발생하고 그 전기 속의 전자는 인간의 육체를 넘어 순식간에 빛의 속도로 전 우주에 퍼진다. 그 전자는 생각이라는 정보를 담고 있다. 봉식아! 라고 리드코프에 외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무의식적으로 그 외침을 듣고 있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입자의 움직임에 변화를 가한다. 빛의 파형을 흐트러뜨린다. 소리를 변질 시킨다. 공기를 흔들고, 쿼크의 회전 수를 줄이거나 늘이기도 하며, 작용에 대해 반드시 반작용을 일으킨다.

  미래는 모두에게 불투명하고 허황된 것이다. 내가 내일 아침 반드시 이를 닦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지구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똑같이 우주에 가능성을 하나 더 하는 일이고, 누구가 그렇게 할 수 있다. 던져진 가능성은 반드시 어떤 형태의 현실로든 우리 앞에 돌아온다. 내가 만들어 던진 미래는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비전을 기록해둔다.  어두운 밤의 허공 속에 하나의 가능성을 던져본다.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던진 미래를 마주하기를 기대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혹, 이 글을 읽은 여러분도 이 순간 미래를 향해 '가능성'이라는 공을 하나 던져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공이 돌아올 것을 상상하며 인생을 즐기기를 바란다. 반드시 그 공이 당신에게 돌아갈 것을 믿는다. 


2011. 5. 10. 부처님 오신날을 기해.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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