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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눈이 내리는데

멀고느린구름 2020. 2. 16. 12:13

눈이 내리고 있다. 구름정원으로 이사 온 후 생생하게 목격하는 첫 눈이다. 양희은 님의 노래 '눈이 내리는데'를 좋아한다. 

 

눈이 내리는데

산에도 들에도 내리는데

모두가 세상이 새하얀데

나는 걸었네

임과 둘이서

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하염없이

 

새벽부터 나리기 시작한 눈은 차곡차곡 거리와 산을 하얗게 덮어가고 있다. 사랑한 후의 마음은 눈으로 덮여진 세상과 같다. 다음 날 눈이 그치고 볕이 들면, 눈은 서서히 녹고 말겠지만 오래도록 켜켜이 쌓인 산봉우리의 눈은 봄이 오지 않는 한 좀처럼 녹지 않는다.

 

이사 온 것을 후회한 낮과 밤들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 하염없이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거실 소파에 기대어 바라보며 문득 떠올렸다.

 

'나 제법 근사하게 잘 살고 있잖아?'

 

이번 생은 망친 것 같다고, 더 이상 애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하며 지냈으나, 오늘 따스하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선물처럼 내리는 눈을 바라보니 마음 안의 캄캄한 검정색이 옅어지며, 회색이 되고, 흰색이 되는 듯하다.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얻었으나, 결국 이사 온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그러니 모쪼록 나를 살게 하는 이 아름다움에 기대어 길고 긴 외로움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야지. 눈이 내리는데. 산에도 들에도 내리는데. 우리들의 상처 위에도 내리는데. 하염없이.

 

2020. 2. 16.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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