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산문/에세이

거절할 수 없는 휴가

멀고느린구름 2020. 2. 27. 10:38

코로나 녀석 탓에 거절할 수 없는 휴가를 제안 받았다. 무려 2주나 쉬게 되었다. 평소라면 이게 무슨 신의 은총이냐며 경축 커피라도 내렸을 테지만 대단한 문제가 있다. 바로, '무급' 휴가라는 문제다. 산술적으로 다음 달에는 월급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예고다. 덕분에 출간 준비를 마치고 입금만 남겨두고 있었던 <오리의 여행 2>의 발간은 3월이나 최악의 경우 4월까지도 연기가 불가피해졌다. 아무래도 출간 비용을 다음 달 월세로 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어제는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해 마음껏 폐인으로 지냈다. - 하지만 장기 칩거를 위한 반찬과 국도 만들고, 청소도 하고, 홍대에 가서 지난 주말 잘못 구매한 물품을 교환해오고, 지나가는 비를 맞으며 산책도 했다. 나는 왜 때문에 이렇게 성실한가; -  이런저런 온갖 실의에 빠져 밤늦게 잠들었다. 스트레스의 용광로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으쌰! 하는 느낌으로 지금은 맥북 앞에 앉았다. 어차피 궁리해본들 답은 정해져 있다. 최대한 돈을 쓰지 않고, 이 시절을 존버하는 것 뿐이다. 

 

정신승리를 위한 비책들을 떠올려보자면, 사실 이렇게 긴 휴가는 몹시 내가 갈구하던 것이다. 내게 최소한 2주 정도만 빈 시간이 있다면 장편소설 퇴고를 집중해서 마칠 수 있을 텐데... 라고 무한한 자기변명을 해왔던 나였다. 이제는 저기요 그게 아니라 라고 말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기약할 수 없는 일이긴 해도, 작품 활동 또한 경제활동이다. 빈 시간 동안 하반기에 출간하려고 하는 연작 장편소설을 탈고해야지! 라고 결심하고 나니 뭔가 대단한 은둔의 소설가가 된 것 같아 기분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틈틈이 그동안 머리로만 구상하고 있던 구름정원 인테리어 보수 작업도 진행한다면 꽤 멋진 두 주가 될 수도 있겠다. 이후에 처해질 경제적 곤궁은 또 그때 가서 열심히 해결하면 되지 않겠나. 아마도 내게 여유자금이 더 많이 있었다면 제주도로 훌쩍 날아갔을 테지만, 그럴 여유가 없는 것도 이래저래 와칸탕카(아메리카 원주민이 신봉하는 우주의 힘)의 뜻이 아닐까 싶다.

 

오늘 아침 눈을 떠 거실로 나오니 봄이 몇 발자국 집으로 걸어들어 온 것 같았다. 인생의 봄이 어디 따로 있겠나. 희미한 미소라도 틔울 수 있는 날은 모두 봄이려니. 뉴스 속에 떠내려오는 허망한 죽음들을 접하며 시간의 무용함을 떠올린다. 우리는 다들 한 철 피어났다 지는 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꽃이 언제 필지, 그 꽃의 색과 향이 무언지조차 모르는 게 함정이지만. 내 꽃은 피었던 걸까, 아직 피지 않은 걸까. 

 

2020. 2. 27. 멀고느린구름.

 

 

'산문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0) 2020.03.10
오늘 하루도 무사히  (0) 2020.03.02
눈이 내리는데  (0) 2020.02.16
목마른 이가 우물을  (0) 2020.01.15
플랜 B의 삶  (0) 2020.01.03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