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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설원의 지평선을 바라보는 일에 대하여



오래전 나는 혼자 대관령의 설원 속을 거닌 적이 있다.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을 무렵이었다. 적어도 내게 사랑은 연애심리학 책에서 말하는 것들과는 달랐다. 인내하고 배려하는 선의 속에서 싹트는 것도 아니며,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재밌는 말을 주고 받는다고 해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에는 시나브로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차갑고 하얗게 덮는 눈. 


눈 덮인 마음을 품고 설원 앞에 섰을 때, 나는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그때의 나는 잘 몰랐다. 아무 것도 모르겠어서 그저 설원 속에 자박자박 발자국만 새기며 백지 속을 휘 돌아보고 나왔다. 내 마음의 눈 위에도 무언가 희미한 발자국이 새겨졌던 것 같으나, 곧 뒤이어 내린 눈으로 다시 지워지고 말았다. 


이윤기 감독의 영화는 말이 없는 영화다. <아주 특별한 손님>, <멋진 하루>,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등 전작들을 보면 사람의 목소리를 별로 들을 수 없다. 그래서 불편하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화를 내며 일어나 나가버리기도 한다. 언젠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를 극장에서 보고 있을 때, 내 옆으로 관객 다섯 명이 화를 내며 나가버렸다. 그 순간 나는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겨우 삼키고 있었다. 


사람은 이렇게 다르다. 나는 이윤기 감독의 영화에서 아주 많은 말들을 '본다'. 배우들의 허망한 눈빛, 조금씩 조금씩 바뀌는 표정들, 뻗었다가 멈칫하고 되돌아오는 손, 담백한 공간, 거리의 소음과 대비되는 인물들의 침묵... 그런 것들 속에서 나는 이 감독이 하고픈 말이 참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내 식으로 느낀다. 


<남과 여>는 감독의 전작에 비해 말이 많다. (이 영화로 처음 이윤기 감독의 작품을 접하는 분들은 웃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작품에서 너무 많은 관객들을 중간에 영화관에서 내보낸 탓에 조금쯤 친절해지려고 애썼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감독의 특성은 두 주인공 속에 살아 있다.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은 여전히 별로 말이 없다. 몇 시예요, 걸으려고요, 만날래요, 기다려줄래요, 뭐 하고 있어요... 서로의 이름도 나누지 않은 채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사랑은 '정보'와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들은 종종 정보와 사랑을 연관 짓는다. 상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고, 상대의 정보와 내가 원하는 정보가 일치하면 사랑이 성립한다고 믿는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나는 봉골레 파스타를 우아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파스타에다가 고추장을 뿌려 먹는 사람은 질색이야." 


나는 봉골레 파스타를 우아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어느날 우연히 나는 파스타에 고추장을 뿌려 먹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연봉, 외모, 가정환경, 성격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 정보들은 어떤 사랑 앞에서는 전혀 무의미해지고 만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어째서 가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닌 외로움을 그대로 이해받는다고 느낄 때, 누군가로 인해 내 마음 어딘가에 쌓인 눈이 녹고, 얼음이 깨진다고 여길 때, 사람은 아무 정보 없이 상대를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 나를 이해한다고 느낄 때, 오히려 사랑의 감정은 더욱 더 커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연 현상이므로. 





핀란드의 설원, 두툼한 옷을 껴입은 두 사람이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이국에서 남과 여, 여와 남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자연을 느낀다. 허나 그것은 잠시. 서울이라는 문명의 세계에서 두 사람은 자연이 아닌 정보들의 세계에, 도덕과 책임, 내가 쌓아올린 명예, 사람들의 말 속에 갇힌다. 


남자 기홍은 애매하고 불안하다. 여자 상민은 답답하고 허망하다. 두 사람의 각기 다른 배우자가 지닌 성격은 둘의 자녀를 통해서 대변된다. 남자 기홍의 딸은 우울증에 걸려 있고, 여자 상민의 아들은 자폐증을 앓고 있다. 기홍은 불안 속에서 딸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상민은 답답함 속에서도 아들의 존재 자체에 의지하려는 마음에 사로 잡혀 있다. 기홍은 불안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거침 없이 자신의 삶을 사는 듯한 상민에게 이끌리고, 상민은 자신의 말을 있는 그대로 자상하게 받아주는 기홍의 따뜻함에 이끌린다. 두 사람은 '정보'가 없어도 서로가 서로에게 잃어버린 퍼즐 조각임을 알 수 있다. 


"잠깐 앉아봐. 나랑 얘기를 좀 해보자."


여자의 남편은 영화의 끝에 이르러 처음으로 여자에게 제안한다. 허망한 제안이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단지 대화로서 서로 이해하는 척하는 합의에 이를 수 있을 뿐,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군가의 상황을, 행동을, 아픔이나 슬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말이 없어지는 일이다. 판단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무엇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마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마치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설원의 지평선을 함께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불륜은 나쁘다. 가정을 지켜야 하는 게 옳다. 이러한 신념을 지닌 분들이 훨씬 많은 사회인 것 같지만, 실제 현실은 10년 이상 그야말로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가정은 드물고 드물다. 결혼한 커플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남은 생을 산다. 여기 당신이 걸어가는 눈 덮인 숲길 저편에 두 갈래 길이 있다. 선택의 기준은 간단하다. 자신을 지킬 것인가, 타인을 지킬 것인가. 선택의 결과는 복잡하다. 자신을 지키는 일이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으며, 타인을 지키는 일이 오히려 자신을 살리기도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당신의 몫이다. 


종종 우리에게 여행지는 유토피아가 된다. 다시 인도에 돌아간다면, 다시 피렌체 성당에서 만난다면... 핀란드에서 만난 여자와 남자, 서울의 현실을 떠나 다시 핀란드로 간다면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을까. 이 말은 이렇게도 들린다. 타임머신이 발명이 되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후회 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역시 답은 각자의 몫. 내 대답은 이렇다. 글쎄요. 이런, 나도 여자 상민에게 혼날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사랑이란...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쪽을 선택하는 일이 아닐까. 선택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마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불행에 지지 말고 모쪼록 살아가기를. 모두 각자가 걸어간 길 위에서 묵묵히 설원의 지평선을 바라보기를. 한 사람의 오롯한 남과 여가 되어. 





2016. 3. 12. 멀고느린구름.


* 사족이 될 것을 알면서도 꼭 이 말을 보태고 싶다. 이 영화는 한국 멜로 영화로는 아마도 근래에 다시 나오기 힘든 최고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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