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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을 때
커피는 어느새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것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까지 커피를 금기의 음식으로 여겼다. 어릴 적부터 커피란 건 어른의 자격을 얻어야만 먹을 수 있는 음료로 배웠던 것이다. 학생의 신분으로 커피를 먹는 이들을 보면, 학생의 신분으로 음주를 하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게 정직한 체제의 모범생이었던 내가 처음 커피 맛을 본 때는 2001년 봄이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의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기숙사에서 나와 혼자 자취방을 얻어 살고 싶었던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친구의 동아리방 옆 지하에 있었던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일터였다. 나는 30분 넘게 보헤미안의 입구에 서서 노란 간판을 보며 망설였다. 간신히 낡은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따랑~ 하는 맑은 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눈 앞에 이국의 풍경이 펼쳐지며 드뷔시의 음악이 들려왔다. 그 순간 고생의 길도 함께 열렸다는 것은 훗날에야 알았다. 보헤미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원두 커피를 마셨고, 핸드 드립이라고 하는 커피 추출의 한 기술을 익혔다.
이 모든 풍경을 한 순간에 불러일으킨 것은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속 한 장면이었다. 내게 커피의 맛과 기술을 가르쳐준 스승님인 보헤미안 안암동점 점장님은 어딘가 영화의 주인공인 요시다씨를 닮았다. 고고하지만 어딘가 여리고 깊은 슬픔을 안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
요시다씨. 요시다 미사키는 스스로를 요다카(쏙독새)에 비유한다. 그래서 커피 가게의 이름도 '요다카 커피'다. 요시다는 네 살 때 아버지와 헤어진 후로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와 헤어진 이유는 부모의 이혼 탓이다. 그럼에도 요시다는 어쩐지 자신이 아버지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요시다씨는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굳이 '죄책감'을 버리지 않는다. 왜일까. 왠지 나는 알 것 같다. 죄책감을 버리면 아버지를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버지는 마음 속에서 또 한 번 버려진다. 그렇기에 요시다씨는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고고하게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요다카 새처럼 죄책감을 짊어지는 쪽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자신만이라도 끝까지 아버지를 그리워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요시다씨는 8년 전 실종 되었다는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인 낡은 바닷가 창고를 개조해 '요다카 커피'를 열고 아버지를 기다린다. 이 창고는 요시다씨가 어릴 적 아버지와 둘이서 살던 곳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는지 여부는 영화를 보고 확인하시길 바란다. 다만, 요시다씨가 아버지의 창고로 돌아왔을 때 이미 아버지는 요시다씨의 마음 속에 돌아온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커피는 사람의 정신을 맑게 만든다. 새벽에 일어나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내리고, 그윽한 향을 맡으며 따뜻한 액체 한 모금을 입 안에 넣으면 푸른 새벽의 풍경이 문득 선명해진다. 푸른 공기의 입자 하나 하나가 모두 살아나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머릿속이 정돈 되며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툭하고 불거져 나오기도 한다.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 쪽이다. 요시다씨는 말이 적은 사람이다. 다만 정성을 다해 커피를 내리고, 그 커피를 고단한 사람들에게 내어준다. 고단한 사람들은 그 커피를 받아 마시고 떠올린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내가 사랑하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이라는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세상의 끝은 그린란드나 남미의 파타고니아가 아니다. 우리 각자가 세상을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을 때,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세상의 끝에 선다. 우리가 세상의 끝에 섰을 때 누구나 각자의 요다카 커피를 만날 것이다. 커피 한 잔을 건네주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 커피를 감사히 받아드는가, 아니면 까페의 문도 열어보지 않고 뒤돌아 서는가 하는 차이는 결국 우리의 하루하루가 모여 만들어낸다. 어느 자리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그리운 것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면... 적어도 커피 한 잔을 감사히 받아들 마음의 자리는 남겨둘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만든 치앙시우청은 대만의 여성 감독이다.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다음 작품이 벌써 그립다. 아, 글을 쓰는 동안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이제 일어서서 커피 잔을 씻을 것이다. 파도 소리가 섞여 있는 음악을 들을 것이다.
2015. 11. 2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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