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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마을에서 



바닷마을에서 산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듣는 소리는 항구의 뱃고동 소리였습니다.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갈 때면 바다 냄새가 나는 바람이 불어 왔습니다. 교실의 창문을 열면 멀리 바다가 보였습니다. 바다 저 편에는 수평선이 있어 늘 '세상의 끝', 혹은 '저 너머 어딘가'라는 말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하나는 절망적이고, 하나는 희망적인 말입니다. 바다에는 끝도 있고 시작도 있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면 항상 모래톱 위에 발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저 아무 것도 없는, 아니 단지 모래밖에 없는 백사장이었습니다. 그점이 저에게 깊은 위안을 주었습니다. 파도처럼 거칠게 휘몰아치는 상념을 공백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해변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걸으며 늘 사람의 처음과 끝을, 혹은 사랑의 처음과 끝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하는 것이 보통의 생입니다. 그러나 그 보통을 유지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저의 부모님은 뜨겁게 사랑해서 일찍 결혼했지만, 아직 어린 아이들을 두고 일찍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새로운 사랑을 찾았습니다. 저는 사랑이 결코 혼인 서약서나 자녀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다음에는 어머니를, 그 다음에는 그 두 사람의 다른 사랑을, 또 결국엔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던 바닷마을의 길에는 그 시절 제가 떨구어 놓은 번민들이 투명한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물론 투명해서 보이지는 않습니다. 파도는 바다의 끝에서 끝까지 이동합니다. 지금 내 앞에서 부서진 파도가 지구의 어디 쯤에서 시작되었는지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저는 종종 떠올렸습니다. 아, 이건 태평양 한 가운데, 이건 뉴질랜드, 이건 와이키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파도는 어디서든 생겨서 흐릅니다. 그리고 결국 부서집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도 어디서든 생겨나서 흐르다가 어딘가에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합니다. 


"아, 이 사람은 사실 진짜로 사랑한 건 아니었어."


그런 것일까요? 글쎄요. 저는 다르게 봅니다. 큰 파도도 작은 파도도 모두 파도이듯이. 사랑이 아닌 사랑은 없다고요. 어쨌든 누군가의 눈을 한동안 오래 바라보고,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작은 선물이라도 건네기 위해 선물가게를 돌아다녀 봤다면 그건 그대로의 사랑인 거라고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제 고향바다 남해가 아닌 동해의 바닷마을에서 보았습니다. 네 자매의 죽은 아버지는 여러 사람을 사랑한 무책임한 남자였습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인간입니다. 저는 결혼을 결정한 이상 충분히 동의되고 합의되지 않은 바람은 절대 피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입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바람을 피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가 어쩌면 사람(성별을 떠나)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편입니다. 하지만 한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하물며 결혼이라는 약속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겠지요. 


이 아버지의 도덕적인 무책임함과 별도로 이 남자는 여러 모로 사랑이 많은 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낳은 딸들의 가슴 속에 하나 같이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을 보면요. 특히 아버지와 오랜 시간을 보냈던 장녀와 막내 딸의 가슴 속에는 그와의 추억들이 여전히 반짝이며 삶의 토양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가족이라고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세월과 바다가 만들어주었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삶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을 하나 배운 바 있습니다. 내가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의 범주가 점점 넓어지는가, 아니면 점점 좁아지는가. 넓어지고 있다면 바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 거라 여깁니다. 좁아지고 있다면 지나온 길을 되돌아 가봅니다.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건, 모른 척하거나 눈감아 준다는 말의 반대말입니다. 모른 척하지 않고 애써 이해하고, 그저 눈감아 주지 않기 위해 곱씹어 용서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닷마을에 살지 않더라도 언젠가 사람이 드문 바다를 한번 걸어보세요. 아득한 멀리서 밀려온 파도의 고향을 떠올리면서요. '바다처럼 넓은 마음'이라는 관용구가 있지만 사실 이 마음은 인간으로서 다다르기 지극히 어려운 경지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걸은 만큼의 해변 정도 넓이, 그 다음에는 헤엄쳐 갈 수 있는 곳까지의 넓이, 그 다음에는 눈에 보이는 수평선까지의 넓이로 조금씩 확장해 갈 수 있을 뿐입니다. 바다를 다 본 적도 없는 우리가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온전히 지닐 수는 없는 것이겠죠. 


욕심을 줄이고,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하다 보면 우리 가슴 속에서도 바다 내음이 나는 바람이 불지 모릅니다. 그 바람이 우리 밖까지 불어가서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세상을 웃음 짓게 할지도 모릅니다. 아주 찰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바로 짙은 바다 내음이 나는 이 한 편의 영화처럼 말입니다. 


2015. 12. 29.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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