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백지 위의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나는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고 들었다. 그런 탓일까. 가까스로 생명을 부여받은 내 속에는 언제나 죽음으로 미끄러지려는 충동과 끈질긴 삶에 대한 의지가 공존한다. 소설 의 주인공 ‘설雪’에게는 태어나서 단 몇 시간 만을 살다가 떠난 언니가 있다. 설은 종종 생각한다. 언니가 죽지 않았다면 이 삶은 바로 언니의 것이었으리라고. 나치의 폭격으로 하얗게 폐허가 되고 만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새로운 돌을 이어서 얹는 방식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바르샤바는 폭격 이전의 모습을 회복했지만 복원된 건물들에는 파괴의 상흔이 선명히 남아 있다. 설은 그 거리를 걸으며 자신 몸 속에도 언니의 시간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떠올린다. 주..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깔끔하게 무시당하는 일쯤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다. 허나 기대가 컸던 만큼 허탈감도 컸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라면 반드시 응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나는 또 다시 동네 꼬마들을 유혹하러 다니는 수밖에 없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 옆에 레모네이드를 내려놓고 조리대로 돌아올 때까지도 사실 기대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다. 조리대로 설거지 해야할 접시들의 산을 보는 순간, 비로소 현실감이 돌아온다. 마치 3년 이상 만나던 남자에게 실연 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는 유리벽을 바라보며 레모네이드를 금세 다 마셔버리더니 곧 카페를 떠난다. 그가 앉았던 테이블을 행주로 닦으며 조금 눈물을 모집한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검은 사슴 - 한강 지음/문학동네 빛이 새어드는 입구는 어디 대관령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바라다보이는 모든 것들은 하얀 색이었다. 작년 이맘 때쯤 나는 대관령의 양떼목장을 보러 혼자 여행을 떠났다. 가방 속에는 한 권의 소설책이 들어 있었다. 한강의 이었다. 책과의 인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가 극장마다 걸려 있을 때였고, 나는 한창 이상은의 라는 음반에 푹 빠져 지냈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어기여 디어라'를 들으며 부산의 보수동 책방 골목을 걷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왔다. 당시 나는 이미 이라는 소설집을 통해 한강 소설가에게 푹빠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 책을 꽂아두었지만 읽지는 못했다. 그해 겨울은 너무 바빴고 해결해야 할 삶의 문제가..
상우의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되면서 카오디오도 함께 꺼져버렸다. 다행히 시동은 걸려 있는 상태였다. 언제 또 무슨 문제가 발생할 지 알 수 없는 차였다. 클러치에서 발을 천천히 떼고 들어왔던 곳으로 차를 몰아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들어왔던 곳으로는 나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차들이 계속 대로 쪽에서 한강 공원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출구를 찾아야 했다. 차를 돌려 반대편으로 가보았다. 디스토피아를 그려보았던 곳까지 이르렀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걸을 때는 흔하게 보였던 것 같은 안내지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면서 정유소를 본 기억은 없었다. 난감했다. 주변을 좀 더 잘 살펴보려고 내려놓았던 차창으로 차 뒤편에서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점점 다가오고 있고, ..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여름과 겨울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강변의 벤치 위에 흰 런닝셔츠 바람으로 드러누운 중년의 남자가 보이는가 하면, 긴팔 운동복을 갖춰 입고 몸을 움츠린 채 경보를 하는 중년의 여자도 보였다. 이쪽 편에 놓인 아파트 단지의 불빛이 거의 꺼져 있는 반면, 강 건너편에는 더러 불빛들이 켜져 있었다. 지도를 보는 취미가 없었으므로 강 저편이 무슨 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행정구역상의 어떤 마을이라기보다는 다른 행성처럼 느껴졌다. 조금 걷다보니 역시 바람에서 여름을 느끼는 빈도가 높아졌다. 이마 언저리에 땀방울이 맺혔다. 옷깃으로 아무렇게나 땀을 훔쳐냈다. 훔쳐낸 자리로 선뜻하게 바람이 불어들었다. 잔디를 보호합시다라고 쓰인 푯말을 보았다. 주위를 살폈다. 잔디 속으로 들어가..
종로에서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길을 걸었다. 종묘에서 안국역까지. 인사동길을 가로질렀다.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붐볐다. 루체른에서의 나와 그를 닮은 외국인들이 보였다. 남극탐사대원처럼 패딩점퍼에 방한 마스크와 두터운 목도리까지 여러겹한 사람은 남국에서 왔을 것이었다. 한편 북국에서 온 외국인들은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이쯤이야 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항구도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외국인의 모습이 이제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지도 위에 있는 검은 점 어디에서나 다른 검은 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자신이 태어난 세계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여행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이국의 여행자가 되어 고국에 대한 향수병을 느낀 뒤에야 내가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 그리 나쁘지 않았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