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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지 위의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나는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고 들었다. 그런 탓일까. 가까스로 생명을 부여받은 내 속에는 언제나 죽음으로 미끄러지려는 충동과 끈질긴 삶에 대한 의지가 공존한다. 소설 <흰>의 주인공 ‘설雪’에게는 태어나서 단 몇 시간 만을 살다가 떠난 언니가 있다. 설은 종종 생각한다. 언니가 죽지 않았다면 이 삶은 바로 언니의 것이었으리라고.
나치의 폭격으로 하얗게 폐허가 되고 만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새로운 돌을 이어서 얹는 방식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바르샤바는 폭격 이전의 모습을 회복했지만 복원된 건물들에는 파괴의 상흔이 선명히 남아 있다. 설은 그 거리를 걸으며 자신 몸 속에도 언니의 시간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떠올린다. 주인공 설은 마치 나처럼 그 속에 죽음과 삶을 함께 안고 살아간다.
| 죽음의 폐허 속에서 다시 생명을 이은 도시 바르샤바
가끔 남극이나 북극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지구의 어느 순간 존재했다는 빙하기의 풍경을 상상하게 된다. 만년설 아래 덮여 지워져버렸을 빙하기 이전의 풍경들도 함께 말이다. 인간은 그 백지의 지구 위에 새로 문명을 쓰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많은 생물학자들이 우리들의 조상을 규명하기 위해 오늘 밤도 연구실의 불을 하얗게 밝히겠지만, 나는 우주의 처음이라는 빅뱅의 순간, 엄청난 빛과 열의 대확산으로 완연한 백지의 상태가 되었을 찰나의 우주를 떠올려본다. 이 세계의 생명은 모두 그 백지 위에 쓰여진 작은 부호들이다.
쓰여지고, 지워지고, 다시 쓰여지는. 꽃이 피고, 눈이 내리고, 다시 꽃이 피는. 우리들은 모두 백지의 순간, ‘흰의 순간’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는 존재들이 아닐까.
어린 시절 무척 친했던 한 친구는 백혈병을 앓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나의 20대를 예리한 음악과 진중한 생각으로 채워주었던 음악가는 어이없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전, 희망 없는 세상에 다시 희망의 등불을 켤 수 있게 해주었던 정치인은 또 한 번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 죽음들 위에 영원한 눈이 내려 새하얗게 지워지더라도, 나는 그 눈 아래에 잠든 죽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 죽음들이 미처 쓰지 못한 말들을 더듬더듬 이어서 써내려갈 것이다. 내 삶을 죽음들에게 기꺼이 빌려줄 것이다. 한 생명은 그리하여 다음 세대에 뜻을 잇고, 한 세계는 그리하여 역사의 다리를 건설한다. 그리고 하나의 별은 그리하여 생명의 터를 보존한다.
삶이라는 이 백지 위의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자리가 시작인 동시에, 모든 자리가 끝이 될 수 있다고 여기며, 문득 윤동주 시인의 다짐을 빌려올 뿐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2018. 7. 2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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