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는 이번에도 10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는 딱 한 번 멈춰 서서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오랫동안 통화를 하긴 했지만 그 외엔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부지런히 여자를 따라가다 보니 여자가 어디로 가는지 어느 순간 분명해졌다. 바람이 신선했다.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일 터였다. " - 조해진 194P 여름을 지나가고 있다. 바람은 차가운 곳에서 뜨거운 곳을 향해 분다. 대류 현상 탓이다. 공기는 풍부한 곳에서 희박한 곳으로 움직인다. 뜨거워진 공기가 대기의 상층부로 올라가버린 빈 자리에 상대적으로 차가운 공기가 흘러와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바람이 가는 곳은 여름의 끝"이라는 말을 한참 동안 생각했다. 여름의 끝은 어디일까. 지구의 적도 부근이 역시 여름의 끝인 것일까. 계절..
말해질 수 없는 것 바로 이때다. 해는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잠겼다. 뒷 편의 아파트에서 일제히 형광등이 켜졌지만 해변의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남자는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희미한 윤곽만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이때가 아니면 영원히 기회는 오지 않겠다는 직감. "나 있잖아..." "어 왜?" 여자의 목소리에 바다가 잔뜩 베어 있다. 쏴아 밀려가는 썰물 소리에 말문이 막힌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몰라, 한 10년 됐나." 기억나지 않는 말을 남자는 이어간다. 여자는 남자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 여자는 무엇에 관심이 있을까...
지난 번 널 만났을 때 지난 번 널 만났을 때 봄이었다 우리는 벚꽃 사잇길을 나란히 걸어 낡은 까페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벽에다 사랑과 청춘을 쓰게 되었을까 저마다의 숱한 벽 위에 쓰인 이야기는 너에게로 흘러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날개짓을 했지만 새장은 날아오르지 못했고 1990년대에 유행한 음악들에 대해서만 우리는 말할 수 있었다 서로가 하나도 변한 게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우리는 변해 있었다 거리로 나와 쓸쓸한 바람을 맞았지만 마냥 쓸쓸해질 수는 없었다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왔기에 바다가 있는 도시에 대해 이야길 나눴다 아무 공통점 없는 말들이 오갔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서로가 변한 게 없다며 위로했다 우리가 알던 사람 중 더러는 꿈을 이뤘고 더러는 성공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