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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읊조리다

詩 - 지난 번 널 만났을 때

멀고느린구름 2010. 6. 2. 11:14


지난 번 널 만났을 때


지난 번 널 만났을 때
봄이었다
우리는 벚꽃 사잇길을 나란히 걸어
낡은 까페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벽에다 사랑과 청춘을 쓰게 되었을까
저마다의 숱한 벽 위에 쓰인 이야기는
너에게로 흘러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날개짓을 했지만
새장은 날아오르지 못했고
1990년대에 유행한 음악들에 대해서만
우리는 말할 수 있었다
서로가 하나도 변한 게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우리는 변해 있었다

거리로 나와 쓸쓸한 바람을 맞았지만
마냥 쓸쓸해질 수는 없었다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왔기에
바다가 있는 도시에 대해 이야길 나눴다
아무 공통점 없는 말들이 오갔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서로가 변한 게 없다며
위로했다

우리가 알던 사람 중
더러는 꿈을 이뤘고
더러는 성공했고
더러는 변한 게 없다
꺼낼 수 있는 세월을 다 꺼낸 후
우리는 길을 잃어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갔다

바다가 있는 도시, 쓸쓸한 바람
1990년대의 음악, 날아오르지 못하는 새장
박제가 된 고백들

너와 나는 벚꽃 사잇길에서 헤어져
각자의 뒷모습을 오래 보았다
그때 흔들렸던 것은
지구였을까, 우리 자신이었을까

지난 번 널 만났을 때.




2010. 6. 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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