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붉은 노을과 푸른 뱃고동 사이 고향에 대해 생각하면 두 가지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새벽녘의 먼 바다에서 들려오던 뱃고동 소리. 다른 하나는 붉게 물든 공터의 노을 속에 흩어지던 아이들의 웃음 소리다. 앞의 것은 부산 감천동의 풍경이고, 뒤의 것은 서울 마천동의 풍경이다. 유년시절의 나는 부산과 서울을 두 축으로 여섯 번이 넘는 전학을 경험했었다. 부산과 서울, 두 풍경 중에 나를 더 유년의 시간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뒤의 풍경이지만, 더 애잔한 마음에 젖게 만드는 것은 앞의 풍경이다. 그래서 때에 따라 내 고향은 부산이 되기도 하고, 서울이 되기도 한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은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를 고향으로 둔 두 청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향을 마음 속에서 지우고 서울에서 성공한..
시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때로 시간은 호수처럼 고여 있다. 지난 밤 크레이터를 드러내며 은은한 빛을 발하던 달을 멍하니 바라보던 때에도, 수 년 만에 북두칠성을 발견한 밤에도 시간은 호수와 같았다. 그런 때의 시간은 손톱 끝으로 건드리면 잔잔한 파문이 일어날 것처럼 액체화된다. 우두커니 서 있는 시간은 청와대 정문을 지키고 있는 무심한 표정의 경호원 같기도 하다. 초능력자가 나오는 영화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흑백으로 변해버리지도 않는다. 바다인가? 라고 생각될 정도의 거대한 호수의 아득한 저편에서 한 무리의 흰 두루미들이 천천히 날아오르고, 고요히 내려앉는 광경을 떠올리는 편이 더 알맞을 것 같다. 호수의 시간은 멈춰 있는 ..
방금 내린 케냐AA 한 잔과 함께 처음 집필실 책상에 앉았다. 고개를 오른 쪽으로 살짝 돌리면 창으로 길죽한 직사각형의 하늘이 보이는 곳이다. 아직은 책상 하나와 몇 개의 악기들을 늘어놓았을 뿐, 인테리어를 시작하지 않았다. 벽지와 벽지 사이의 틈이 갈라진 곳도 있고, 진득한 테이프 자국이 남은 곳도 보인다. 이런 것 정도는 보수를 해달라고 요청한 뒤 이사를 했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지난 겨울 별 생각 없이 이 마을을 찾았다. '다방'이라고 하는 부동산 매물 찾기 앱을 통해 본 다락방이 있는 작은 집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주말에 심심하니 남의 집이라도 보고 다니자는 심산이었다. 마을에 도착해 앱에 있는 연락처로 연락을 했으나 오늘은 보기 어렵다는 답을 받았다. 어차..
봄이 지나가고 있다. 녹음은 짙어지고, 어린 새들은 자란다. 아침이면 어디선가 날아와 지저귀는 작은 새들의 목청이 어제보다 커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자라나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냥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있었다는 쪽에 가깝다. 격동의 사춘기라고 해도 워크맨과 함께 정처없이 거리를 걷고, 농구공으로 수 천 번의 포물선을 그리고, 가끔 숲 속에서 하늘에 펼쳐진 구름을 바라본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20대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이야기를 썼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은 듯한데, 어느새 30대에 대해서도 그런 이야기를 써야 할 때가 되었음을 어제서야 알았다. 무심코 계절을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오랜 친구에게서 30대의 마지막 여름을 잘 보내자는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다. 잠..
양명대 303과 우리의 생은 때로 어떤 음악에게 빚을 진다. 오지은 서영호의 프로젝트 음반 을 씨디플레이어에 걸고 첫 가사를 들었을 때 내가 이 음악에게 빚을 지겠구나 직감했다. 이 음반이 첫 번째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유지하고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다소 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쓸쓸함이라거나, 외로움 같은 말로 간단히 표현하거나, ‘멜랑꼴리’ 같은 세 줄 짜리 음악평론에 등장하는 어휘를 사용할 수는 없다. 20대 시절에 나와 친구들은 양명대 303에서 종종 모여 대통령 선거라든가, 마음이 이끌리기 시작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명대’는 우리 중 한 친구가 살던 빌라의 이름이고, 삼공삼은 당연히 303호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묘하게도 양명..
박낙종 베트남은 호치민 이후에도, 이전에도 이 책은 썩 훌륭한 책이다. 베트남과 라오스와 미얀마를 지도에서 구분해내기 위해 구글 검색 찬스를 써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말이다. 베트남이 독립국으로서 18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인구는 1억에 육박하고, 수십 갈래의 소수민족과 공생해오는 동안 유네스코에서 보존가치를 인정한 다채로운 전통문화를 꽃피워왔다는 사실을 나는 당연히 몰랐다. | 베트남은 장구한 역사와 다채로운 문화를 지닌 나라다 내가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 한대수의 노래 중에 '호치민'이라는 곡이 있다. "호치민에 대해서 말하자면 거 참 재밌는 사람이에요."하고 시작되는 한대수의 읊조림은 폭격음처럼 거칠게 쏟아지는 록 사운드를 견뎌내며 이어진다. "약 3200일의 끝없는 폭격을 밤낮으..
손경수 카리브의 바다는 어떤 빛깔로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우편함에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흰 봉투가 있다. 혹시라도 내가 폭발물 테러의 대상이 될 정도의 국가주요인물일까봐 걱정하며 봉투를 열었는데, 그 속에서 공짜 비행기 티켓이 한 장 나타난다. 이 티켓에 쓰여진 여행지에 대해 서술하시오. 위와 같은 문제가 느닷없이 20대 후반 즈음의 내게 출제되었다면 나는 분명 쿠바에 대해 써내려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창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폐해를 겪으며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체게바라의 열풍은 이미 한반도를 지나간 지 오래였지만, 나는 뒤늦게 라는 영화를 통해 ‘체’에게 빠져들었었다. | 혁명가가 되기 이전 청년의사 체게바라의 여행을 다룬 영화 내게 쿠바는 영웅의 나..
오사코 히데키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해 말하려면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머리 위에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린다. 신발 속의 모래를 털어내야 할 것 같고, 기아에 굶주려 형형히 눈동자만이 빛나는 아이들에게 무어라도 건네야 할 것 같다. 우리 속의 아프리카는 그렇게 하나의 대륙에서, 경계가 불분명한 하나의 나라로, 그리고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어 왔다. 나는 아프리카 대륙에 53개국의 나라가 있으며, 다양한 기후와 자연환경이 존재하고, 피부색도, 문화도, 종교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모호한 이미지만으로 판단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선입견’이라고 부른다. 아프리카는 내게 그 대륙의 크기만큼 거대한 ‘선입견’이었다. |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마사이족'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