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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수 <위대한 쿠바>


카리브의 바다는 어떤 빛깔로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우편함에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흰 봉투가 있다. 혹시라도 내가 폭발물 테러의 대상이 될 정도의 국가주요인물일까봐 걱정하며 봉투를 열었는데, 그 속에서 공짜 비행기 티켓이 한 장 나타난다. 이 티켓에 쓰여진 여행지에 대해 서술하시오.

 

위와 같은 문제가 느닷없이 20대 후반 즈음의 내게 출제되었다면 나는 분명 쿠바에 대해 써내려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창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폐해를 겪으며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체게바라의 열풍은 이미 한반도를 지나간 지 오래였지만, 나는 뒤늦게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를 통해 ‘체’에게 빠져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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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가가 되기 이전 청년의사 체게바라의 여행을 다룬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내게 쿠바는 영웅의 나라이자, 대안의 나라였다. <위대한 쿠바>의 저자 손경수 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받기 전 원주민들은 쿠바를 ‘코아바나(coabana)’라고 불렀다. ‘위대한 장소’라는 의미다. 위대한 혁명가 체게바라가 잠들어 있는 땅, 신이 선사한 위대한 자연의 보석 카리브해가 품은 섬, 위대한 문학가 헤밍웨이의 안식처. 이처럼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쿠바 곁에서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물론, 쿠바가 위대하기만한 것은 아니다. 쿠바의 느린 템포는 대중교통과 식료품점에도 적용되어, 제 시간에 버스를 타는 일도, 먹고 싶은 음식을 원하는 때에 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체게바라의 이상과 낭만이 영원히 머무를 것 같은 쿠바에도 자본의 그늘은 드리워져 있고, 사람들의 마음은 종종 욕망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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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밍웨이배 낚시 대회에 참가한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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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열정이 채 식지 않은 나라 쿠바 

 

 

그럼에도 쿠바에는 여전히 혁명의 정열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이 많다. 이바나에서 만난, 체의 친구였던 86세의 노인 카를로스의 가슴 속에도 쿠바의 도로를 누비는 붉은 클래식 스포츠카 같은 불꽃이 여전히 머물고 있다. 그의 아내 마피는 쿠바에서 ‘캐서린’이란 예명을 썼던 저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카뜨리나, 사랑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어. 정치적 진보나 혁명과 같은 이데올로기도 중요한 것들이지만 이렇게 나이가 들고나면 깨닫게 되는 법이지. 결국 남는 건 사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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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담담한 소설처럼 읽히는 여행기, <위대한 쿠바>. 아주 잠깐 꿈결에 나도 체의 친구 카를로스 노인을 만나고 온 듯하다. 그나저나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감히 ‘천국’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라니, 대체 카리브의 바다는 어떤 빛깔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2018. 7. 13.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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