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지나가고 있다. 녹음은 짙어지고, 어린 새들은 자란다. 아침이면 어디선가 날아와 지저귀는 작은 새들의 목청이 어제보다 커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자라나는 것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냥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있었다는 쪽에 가깝다. 격동의 사춘기라고 해도 워크맨과 함께 정처없이 거리를 걷고, 농구공으로 수 천 번의 포물선을 그리고, 가끔 숲 속에서 하늘에 펼쳐진 구름을 바라본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20대에 대해서도 그런 식의 이야기를 썼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은 듯한데, 어느새 30대에 대해서도 그런 이야기를 써야 할 때가 되었음을 어제서야 알았다. 무심코 계절을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오랜 친구에게서 30대의 마지막 여름을 잘 보내자는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다. 잠..
양명대 303과 우리의 생은 때로 어떤 음악에게 빚을 진다. 오지은 서영호의 프로젝트 음반 을 씨디플레이어에 걸고 첫 가사를 들었을 때 내가 이 음악에게 빚을 지겠구나 직감했다. 이 음반이 첫 번째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유지하고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다소 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쓸쓸함이라거나, 외로움 같은 말로 간단히 표현하거나, ‘멜랑꼴리’ 같은 세 줄 짜리 음악평론에 등장하는 어휘를 사용할 수는 없다. 20대 시절에 나와 친구들은 양명대 303에서 종종 모여 대통령 선거라든가, 마음이 이끌리기 시작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명대’는 우리 중 한 친구가 살던 빌라의 이름이고, 삼공삼은 당연히 303호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다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묘하게도 양명..
박낙종 베트남은 호치민 이후에도, 이전에도 이 책은 썩 훌륭한 책이다. 베트남과 라오스와 미얀마를 지도에서 구분해내기 위해 구글 검색 찬스를 써야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말이다. 베트남이 독립국으로서 18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인구는 1억에 육박하고, 수십 갈래의 소수민족과 공생해오는 동안 유네스코에서 보존가치를 인정한 다채로운 전통문화를 꽃피워왔다는 사실을 나는 당연히 몰랐다. | 베트남은 장구한 역사와 다채로운 문화를 지닌 나라다 내가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 한대수의 노래 중에 '호치민'이라는 곡이 있다. "호치민에 대해서 말하자면 거 참 재밌는 사람이에요."하고 시작되는 한대수의 읊조림은 폭격음처럼 거칠게 쏟아지는 록 사운드를 견뎌내며 이어진다. "약 3200일의 끝없는 폭격을 밤낮으..
박홍규 화백의 판화 . 본문의 그림은 모두 박홍규 화백의 판화. 다시 새 하늘 열리면 기억해주오 * 이 소설은 경북 상주 지역 동학 대접주 김현영 선생의 후손인 김종규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고종 갑오년 음력 9월 초엽이었다. 상주의 김현영 접주는 이미 지난 8월 25일, 남원에서 김개남 접주가 재봉기를 결행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난 6월 21일, 왜구가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한 이후로 민심은 들끓고 있었다. 왜란 때 이 강산에 흘려진 피가 채 마르지 않았다. 무능한 신하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임금의 판단을 흐리며, 여전히 민씨 일가가 국정을 문란케 하고 있으니 저 왜구들이 나라의 대들보를 뜯어가도 이리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천의 최맹순 접주도 농민군 조직을 다시 정비..
손경수 카리브의 바다는 어떤 빛깔로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우편함에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흰 봉투가 있다. 혹시라도 내가 폭발물 테러의 대상이 될 정도의 국가주요인물일까봐 걱정하며 봉투를 열었는데, 그 속에서 공짜 비행기 티켓이 한 장 나타난다. 이 티켓에 쓰여진 여행지에 대해 서술하시오. 위와 같은 문제가 느닷없이 20대 후반 즈음의 내게 출제되었다면 나는 분명 쿠바에 대해 써내려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창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폐해를 겪으며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체게바라의 열풍은 이미 한반도를 지나간 지 오래였지만, 나는 뒤늦게 라는 영화를 통해 ‘체’에게 빠져들었었다. | 혁명가가 되기 이전 청년의사 체게바라의 여행을 다룬 영화 내게 쿠바는 영웅의 나..
오사코 히데키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해 말하려면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머리 위에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린다. 신발 속의 모래를 털어내야 할 것 같고, 기아에 굶주려 형형히 눈동자만이 빛나는 아이들에게 무어라도 건네야 할 것 같다. 우리 속의 아프리카는 그렇게 하나의 대륙에서, 경계가 불분명한 하나의 나라로, 그리고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어 왔다. 나는 아프리카 대륙에 53개국의 나라가 있으며, 다양한 기후와 자연환경이 존재하고, 피부색도, 문화도, 종교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모호한 이미지만으로 판단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선입견’이라고 부른다. 아프리카는 내게 그 대륙의 크기만큼 거대한 ‘선입견’이었다. |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마사이족'의 ..
씨디플레이어를 멈출 때 아직 노래가 다 끝나지 않은 씨디플레이어를 멈출 때면 늘 열심히 노래하고 있는 가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망설이게 된다. 어지간하면 적어도 하나의 곡은 끝이 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스톱 버튼을 누르곤 한다. 오늘 아침에는 한 듀오의 노래를 듣다가, 쓰려는 글과 어울리지 않아 중간에 멈추고 말았다. 어쩌면 아직 침대에 누워 주말의 단잠을 자고 있을 그 가수는 지구의 어딘가에서 자신의 노래가 중간에 끊겨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게 그리 대단한 충격파를 던질 사건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카리브해에서 출발한 물결이 오랜 세월을 지나 언젠가는 경포대의 모래톱을 적시는 것처럼, 내가 멈춘 단 한 번의 음악도 한 가수의 삶을 흔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까지 생각해버리면..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도 우리가 지금 멀리 있을지라도 이 바람 한 오라기 네게 가닿지 않겠냐아슴푸레한 별처럼 우리의 옛일 들리지 않겠냐 사랑은 곁에 있을 땐 달의 뒷편에 자더니너 먼먼 소식으로 가마득하니이제서야 흰 창에 자옥하다 너를 그리는 밤은 소란하다캄캄하고 청량한 숨소리함께 거닌 해변 위의 발자욱 소리서로의 고독에 입맞추던 소리별이 반짝 빛나던 소리시간이 아무 곳으로나 흐르는 소리나는 소란한 소리들을 담아 겨울 귀뚜라미에게 가져가며누구나 상처는 깊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헤아리려는 것은별의 값을 묻는 것처럼 슬프고 우스운 일이지만아무튼 내 사랑은 대류에 닿지도 못하여빈 골목에서 고작 네 밤길만을 비추었다이 사랑 너무 낮고 불안해 우리는 지구의 공전에 흔들렸을까별들의 사이처럼 서서히 멀어졌을까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