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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화백의 판화 <피노리 가는 길>. 본문의 그림은 모두 박홍규 화백의 판화.

 

 

 

다시 새 하늘 열리면 기억해주오

* 이 소설은 경북 상주 지역 동학 대접주 김현영 선생의 후손인 김종규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고종 갑오년 음력 9월 초엽이었다. 상주의 김현영 접주는 이미 지난 8월 25일, 남원에서 김개남 접주가 재봉기를 결행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난 6월 21일, 왜구가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한 이후로 민심은 들끓고 있었다. 왜란 때 이 강산에 흘려진 피가 채 마르지 않았다. 무능한 신하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임금의 판단을 흐리며, 여전히 민씨 일가가 국정을 문란케 하고 있으니 저 왜구들이 나라의 대들보를 뜯어가도 이리 잠자코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천의 최맹순 접주도 농민군 조직을 다시 정비하고 있다는 통문을 받았다. 허나 아직 최시형 교주의 기포령은 내려오지 앉았다. 남접의 수장인 전봉준 접주는 김개남 접주의 재봉기를 말리다가 되려 그 결기에 설득되고 말았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대원군이 암암리에 동학농민군의 거국적인 재봉기를 청원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심지어 고종의 밀사도 다녀갔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위쪽의 움직임보다도 민심이 곧 폭발하려는 화산과 같았다. 백성이 곧 하늘이니 민심이 곧 천심이라. 김 접주는 동학농민군이 다시 죽창을 손에 들 날이 머지 않은 듯 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3월의 싸움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3월의 싸움은 남접만의 힘으로도 승전보를 전할 수 있었다. 관아에는 탐관오리가 가득했고, 병졸들은 나라를 지키기보다 제 목숨 지키기에 바빴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에게는 제폭구민, 보국안민이라는 대의가 있었고, 우리의 뜻이 저들의 무기보다 강했다. 천명도 우리와 함께 했다. 하늘은 세상을 갈아치우라고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민초들의 등을 떠밀어주었다. 전 접주가 진주성을 함락했을 때 5월의 태양은 이 상주 땅마저 싱그럽게 만들었다. 어깨 춤이 절로 났고, 우리들은 능히 세상이 바뀌리라 기대했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니, 우리들 각자의 심중에 하늘이 있으니 우리가 가는 길이 곧 하늘의 길이고,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곧 천국이라. 호남에 집강소가 설치되고 백성의 뜻을 모아 다스림을 행하니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이 왔노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뛰었었다. 우리도, 우리 상주에도 예천에도, 그리고 경북 전역에도 사람 사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 접주는 3월 혁명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늘 후회 막급이었다. 그래, 이제 다시 기회가 왔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이번을 놓치면 다시는 민초들이 우르르 들고 일어나 세상을 바꿀 순간은 100년이 지나도 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얼마 전 영남 지방의 접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상주 김 접주와 이관영 접주, 예천 최맹순 접주, 김산의 편보언 접주 등 각 주요 접주들이 시운과 관련해서 중지를 모으기 위해 만난 것이었다. 이견은 없었다. 왜구의 횡포를 더이상 좌시해서는 안 되며,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왜구들이 황해도에서 남하하여 증원해오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왜구군의 핵심인 병참부를 공격하여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주의 의중이 문제였다. 호중의 접주들이야 이미 교주와 별개로 생각을 하고 남접 조직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한다지만 영남 북접마저 교주의 뜻을 함부러 거스를 수는 없었다. 김 접주와 최맹순 접주를 중심으로 교주의 기포령을 기다리되 기포령이 떨어지는 즉시 재봉기할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추어 놓자는 데 마음을 모으고 각 접주들은 다시 흩어졌다. 

 

그로부터도 꽤 시일이 지났건만 교주의 기포령은 아직이었다. 호중에서는 전봉준 접주가 일어섰다. 전봉준 접주가 일어섰으니 남접은 모두 재봉기할 것이 틀림없었다. 허나 남접의 세력만으로 왜구를 몰아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죽음이 될 수도 있었다. 모두가 함께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김 접주는 고심을 거듭하다 혼자 고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닌 듯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현동과 현영 두 아우들을 만나 술이라도 한 잔씩 기울이며 우리가 먼저 재봉기하는 안에 대해 뜻을 물어볼 요량이었다. 거리에 나서자마자 와락 바람이 달려들었다. 더위는 이제 완전히 가셨다. 음력 9월, 들에는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싸움을 시작한다면 곧 10월, 그리고 11월이 될 터였다. 식량은 걱정이 덜하다고 해도 추위는 어찌 할 것인가. 아, 그전에 장정들이 죄다 떠나면 추수는 어찌 한단 말인가. 김 접주는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개죽음일 뿐이다. 예전의 왜구가 아니었다. 저, 노국을 몰아내버린 왜구가 아닌가.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살아오신다고 해도 힘겨울 싸움이었다. 하물며 죽창을 든 민초들이야. 집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멀리서 김 접주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통문이 왔습니다. 교주께서 보내셨습니다!”

 

마침 첫째 아우 현동이 통문 한 권을 손에 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김 접주는 통문의 내용을 직감했다. 3월 남접의 봉기에 대해서는 지지하되 관여하지 않기로 길을 정하셨던 교주셨다. 아무래도 큰 뜻이 있다고는 하나 나라를 상대로 피를 흘려서는 만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고 판단하셨던 것이다. 피보다 뜻과 정(情)으로써 후천개벽의 시대를 도모하려던 교주셨다. 그러나 후천개벽을 하려는 그 나라가 왜구들의 손에 사라지고 나면 수운 교조의 도(道)가 다 무슨 소용이랴. 이번에는 함께 일어나실 것이다. 반드시 그리 결정하실 것이다 믿었다. 나 혼자 일어나는 일은 개죽음에 불과하겠으나 함께 일어난다면 다르리라. 조선 팔도에서 민초들이 모진 바람에 굴하지 않고 우르르 일어난다면, 짓밟히고 또 짓밟히더라도 일어난다면, 우리가 참으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볼 수도 있으리라. 민초들이 모여 들판을 뒤덮고, 성난 파도처럼 밀려간다면 그 장엄한 의기에 관군들의 마음도 돌아설 수 있으리라. 김 접주는 마음 속으로 결의를 다지며 통문을 펼쳐들었다. 

 

“쇠운이 가고 성운의 때가 가까워져오고 있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천운의 기가 모이는 것을 저 왜구들이 총칼로 가로막고 있으니 우리 만백성들의 천심을 모을 때인 듯 합니다. 일어나야 한다면 모두 함께 일어납니시다. 무도한 저들에게 하늘님의 뜻을 일깨워 줍시다. 여러분의 안에 늘 하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용맹하게 싸웁시다.”

 

 

 

 

김 접주의 가슴 속에 횃불이 켜졌다. 아우 현동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김 접주의 손을 맞잡았다. 그날 밤 김 접주의 집에서 현동, 현양 세 형제가 모여 봉기계획을 재점검하고, 예천의 최맹순 접주에게 통문을 보냈다. 다음 날에는 상주의 교도들과 농민군을 규합하여 봉기 결의를 다지고, 무기를 점검했다. 그 자리에는 지역의 뜻있는 유생들과 몇몇 향리들의 얼굴도 있었다. 김 접주는 그들의 손을 맞잡으며 뜨거운 동지애를 나눴다. 함께 왜구를 몰아내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다짐했다. 재봉기 채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불과 4일만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김 접주는 기꺼이 선봉장이 되어 상주읍으로 진격했다. 기포령을 받아든 뒤 일주일만이었다. 민초들이 손에 쥔 것은 죽창만이 아니었다. 각자 가슴에 켜진 횃불도 함께 들려 있는 것이었다. 민초들이 죽창을 내지르면 가슴의 불길도 함께 뿜어져 나왔다. 수 백년을 밟혀온 가슴이었다. 수 백년 동안 짓밟혀도 일어나고 다시 일어나 이 땅을 일구어냈던 가슴이었다. 땅을 일구는 사람은 그 스스로 땅이 된다 하였다. 민초들은 기꺼이 땅이 되고자 하였다. 자신이 땅이 되고, 자신의 피가 강이 되어, 그 위에서 새 세상이 싹을 틔울 수 있다면 기꺼이 춤을 추며 목숨을 내놓겠다는 사람들이었다. 왜구들은 신식 총으로 무장하고 백리 밖에서 자신들이 누구를 쏘아 죽이는지도 모른 채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였다. 김 접주는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쏘아라. 네 놈들이 내 심장을 꿰뚫는다고 해도 또 다른 내가, 그 또 다른 내 심장마저도 피를 쏟는다고 해도, 그 뒤에 있는 또 다른 내가 끝끝내 네 놈들의 총부리를 꺾어 놓을 것이다. 대도(大道)를 함께 나누고 있는 동지들은 모두가 김 접주였다. 왜구들이 사람을 쏘아 죽일 수는 있을 지언정 천명을 쏘아 없앨 수는 없으리라. 김 접주는 죽창을 그러쥐고 달렸다. 흰 베옷은 점점 검붉게 물들어 갔다.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서쪽으로 저물고, 다시 한 번 해가 떠올라 서편으로 기울었다. 내가 물러나면 곧 사람 사는 세상도 물러난다. 김 접주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땀과 피와 울분의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에 볕이 비치면 따금따끔했다. 함성 소리와 비명 소리에 놀라 달아나는 들판의 풀벌레들과 잠자리 떼를 보며 김 접주는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후천개벽의 새 세상이 오면 뭇 생명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제 몫의 삶을 넉넉히 살며 웃음 짓게 되리라. 김 접주의 횃불이 다시 한 번 환하게 타올랐다. 김 접주는 다시 한 번 동지들을 향해 외쳤다. 

 

“갑시다! 새 세상을 향해 갑시다!”

 

김 접주의 가슴에서 타오른 불길이 곁의 민초에게로 옮겨 붙고, 다시 그 곁으로 옮겨 붙어, 커다란 들불이 되었다. 들불은 삽시간에 상주 읍내를 삼켰다. 고종 갑오년 9월 22일, 김 접주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상주읍을 탈환하는 순간이었다. 

 

상주읍을 점령한 김 접주의 동학농민군은 곧 상주 관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민심을 수습했다. 왜구는 모두 몰아내고, 투항한 관군들은 동지로 받아들였다. 뜻을 같이 하기로 한 관군들은 병복을 벗고 수건을 둘러맸다. 

 

“우리가 다 같은 피를 지닌 동포이거늘 어찌 서로 창을 겨눠야 하겠소. 창을 겨눠야 할 데는 우리들 서로가 아니라 이 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저 왜구와 새 세상의 길목을 가로 막고 선 탐관오리들 아니겠소. 병졸의 목숨이라고 함부로 죽고 사는 것이 아니오. 임금의 목숨이나 병졸의 목숨이나 다 같은 한 목숨이오. 저마다 그 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귀한 목숨이니 우리 이 목숨을 함께 하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씁시다.”

 

상주 관아에 자리한 집강소에서는 반상을 가리지 않고 각 마을의 대표되는 이들을 다섯 씩 고루 뽑아 민회를 열었다. 민회에서는 현재 각 마을의 문제점과 해소방안이 허심탄회하게 논의됐다. 김 접주는 각 대표들의 의견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 중지가 사사로운 견해나 이익에 치우치지 않고 사람 속에 있는 하늘의 소리에 가깝게 되도록 이끌었다. 낯선 방식, 아직 채 허물어지지 못한 신분 간의 벽, 서로 알고 있는 지식의 차이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김 접주는 기뻤다. 아득히 멀게만 느꼈던, 잠시 비추다 사라지고 마는 무지개처럼 실체가 잡히지 않았던 새 세상이 너무나 분명하게 눈 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모든 차이를 뛰어 넘어 공평한 말의 기회를 얻고, 공평한 무게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지금 제 앞에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김 접주는 잠들기 전,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며 하늘을 향해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제발 이 꿈이 사라지지 않기를. 저만치 와 있는 새 세상이 성큼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오기를. 비나이다 비나이다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꿈은 단지 6일 간 계속되었다.   

 

 

 

고종 갑오년 9월 28일, 달이 짙은 안개에 가리워진 밤에 왜구들이 급습했다. 패퇴했던 잔당들이 원군을 끌고 나타난 것이었다. 원군 속에는 조정에서 보낸 관군과 민보군도 섞여 있었다. 민씨 일파야 왜구와 손을 잡았다고 하나 성리학을 배웠다는 지역 유생들과 향리, 양반들마저 민보군으로 왜구의 편에 끼어 있는 것은 통탄할 노릇이었다. 김 접주는 관군과 민보군을 향해 하늘의 뜻을 함께 받들자고 설득했지만 그들은 새로 올 세상보다 지금의 세상을 더 편히 여기는 자들이었다. 

 

“지금의 세상을 저 왜구가 지켜줄 것 같소이까! 여기서 우리가 물러나면, 우리가 죽으면 당신들의 세상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소이까. 아니오! 어찌 모르시오. 우리가 죽으면, 우리가 여기서 물러가면 지금보다 더 캄캄한 세상이 올 것이오. 왜구들이 활개치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오. 어찌 그걸 모르신단 말이오!”

 

왜구 편의 연합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민초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더욱 무장한 신식 무기 앞에 죽창을 든 민초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갔다. 어제만 해도 집강소에 둘러앉아 새 세상을 꿈꾸며 웃음 짓던 동지들이었다. 가장 앞서서 왜구들과 싸웠던 김윤집 동지는 죽어가면서 아들 주희를 모쪼록 잘 부탁드린다고 했다. 일찍이 어린 아들과 함께 동학에 입도했던 이였다. 어린 아들은 재봉기 전에 혼자 속리산에 득도를 하겠다고 집을 나섰다고 했다. 아직 미망하여 큰 도를 깨닫기 어려움이 있으니 지도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김 접주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꼭 살피겠다고 약속했다. 

 

백 여명의 동지들이 죽음을 맞고, 점점 뒤로 물러서게 되자 내부에서도 돌아서는 자들이 생겨났다. 불과 열흘 전 함께 왜구를 몰아내고 새 세상을 만들자 두 손을 맞잡았던 유생들과 향리들이었다. 그들은 조정과 임금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며 김 접주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 

 

김 접주의 눈에는 피눈물이 흘렀다. 자신들의 진정을 몰라주는 어리석은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자신들을 밀어내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왜구들과 민보군의 세력은 날이갈 수록 보강됐다. 소모사로 내려온 정의묵은 대대적으로 민보군을 지원하며 동학농민군을 압도했다. 지역 향리들에게 읍성을 내어주며 ‘집강소’라는 명칭으로 민보군 조직을 정비하도록 했다. ‘집강소’는 바로 새 세상을 만들려는 동학농민군의 자치기구 명칭이었다. 모욕적인 일이었다. 왜구들의 공격이 잠잠해진 이후에도 소모사 정의묵은 별도의 유격병대까지 꾸려서 김 접주를 추격했다. 그리고 추위가 닥쳐오기 시작하던 11월, 아우 현동이 유격병대장 김익중의 손에 의해 살해 당했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동지들의 성화에 떠밀려 산으로 산으로 숨어 들어가면서도 김 접주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절대 뒤돌아 보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서 탈환했던 꿈이 이제는 뒤돌아봐야만 하는 곳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뜨겁게 타올랐던 가슴 속의 횃불이 커다랗게 불을 질러보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있었다. 김 접주는 빈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악! 악! 하는 외마디 외침이 천지를 어지러이 뒤흔들었다. 

 

 

 

 

 

 

동생 현양과 함께 김 접주는 깊은 산 자락 속을 이리저리 오가며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김 접주는 산 속에서 은거하면서도 종종 패퇴하던 때에 자기 손을 꼭 붙잡고 아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김윤집 동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눈동자를 생각하면 새 세상이 오기 전에는 먼저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 접주는 아우 현양과 함께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문을 외우고 또 외웠다. 횃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아들 규배는 김 접주의 뜻을 나라가 왜구에게 넘어간 이후에도 계속 항일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김 접주는 비록 산에서 내려올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지만 아들이 찾아올 때면 늘 동학의 큰 뜻을 다시 한 번 가르치며 정도를 걸어갈 것을 염원했다. 규배로부터 김윤집 동지의 아들 김주희 군의 소식도 종종 듣게 되었다. 북접의 일원이었던 아비와 달리 스스로 남접을 자칭하며 수운 선생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경천교라는 새 종교를 열었다가 곧 떨어져나와 동학교라는 종교를 세우더니 총독부 산하의 관리를 받는 공공 종교가 되어 혹세무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 접주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쳤다. 아들을 부탁하던 김윤집 동지의 눈동자가 아직 눈에 선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달음에 산을 내려가 아비의 뜻을 일깨워주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김 접주는 끝내 김주희 군을 만나지 못한 채 조국이 일제의 손에서 해방되던 해가 되어서야 마지막 주문을 외우고 눈을 감았다. 김 접주가 꿈꾸던 새 세상이 조국의 해방과 함께 찾아오리라고 다시 한 번 꿈꾸며. 

 

2014. 10월.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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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 현재 상주시는 실제 동학농민혁명에 앞장 섰던 김현영 선생에 대한 역사적 연구나 기념은 도외시 한 채, 정수기를 교주로 둔 경천교에서 갈라져 나와(항일 의병 운동을 거부하려는 뜻으로) 훗날 동학의 이름을 차용했을 뿐이라고 연구가들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총독부 공인 종교단체(일제강점기 시절 총독부의 공인을 받았다는 점은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동학교 교주 김주희를 우상화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몹시 안타까운 노릇이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처럼 동학농민혁명의 주역들도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양식 있는 역사가들과 행정가들의 관심과 성찰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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