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 중국행 슬로보트 / 제목 없음

제목 없음 

제목에만 의지하여 시작되는 소설이라면 나도 쓴 적이 있다. 이렇게 문장을 쓰는 순간 이미 하루키에게 지고 시작하는 게임이 된다. 그는 나보다 훨씬 연상이고, 훨씬 이전부터 프로 소설가로서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글을 통해서 무언가 남과 승부를 내보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발상이라고 이제 와서 이야기하기도 조금 머쓱하다. 아무튼, 아무튼이라고 정리하자면 소설가 중에서는 제목만 정해놓고 그 제목에서 풀려나오는 대로 멋대로 이야기를 써버리는 부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집이라고 열심히 홍보를 하고 있는 이 소설집은 그런 부류의 소설 작법을 통해서 만들어진 소설집이다. -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는 모양이지만 대다수가 그런 식이다. - 

일단 읽어보면 알겠지만 제목과 전혀 상관 없는 내용의 이야기들이 밑도 끝도 없이 전개되어 간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는 무렵에는 어쩐지 왜 이런 제목이어야 했는지 공감하게 된다. 써 본 사람의 경험담을 반영하자면 아마도 이런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았을까 싶다.

1. 무언가 멋진 제목이 떠올랐다. 2. 무언가 멋진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3. 예상대로 멋진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4. 분명 멋진 이야기였는데 어느새 별로 멋지지 않은 이야기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5. 대체 왜 이 이야기를 시작했던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6. 제목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7. 이야기는 점점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8. 다시 한 번 제목을 들여다본다. 9. 어떻게든 제목의 의미를 살려보려고 애쓰지만 등장인물들은 이미 미궁 속에서 길을 잃었다. 10.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계속 전개해본다. 11. 간신히 미궁 속을 빠져 나와 보니 처음 들어갔던 입구로 나와 있었고, 그 입구에는 큼지막하게 글의 제목이 쓰여져 있다. 

대충 이런 프로세스다. 최근에 내가 쓴 단편 '모자를 내려놓거나 내 생일선물을 잘못 사온 남자'도 대개 이런 공정을 통해서 완성되었고, 그 이전의 제목소설(이참에 이런 장르를 만들면 어떨까)도 그렇게 쓰여졌다. 지금 소개한 이 프로세스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수록작은 '가난한 아주머니 이야기'일 것이다. 이 소설은 가난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와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는 제목소설 중에서도 가장 제목과 잘 어울리는 분위기의 이야기가 완성된 경우가 아닐까 싶다. 표제작인 중국행 슬로보트는 제목소설의 선구적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어쩐지 정석적인 소설 구조를 지니고 있는 느낌이다.  

<노르웨이의 숲>이 된 '반딧불이'처럼 '오후의 마지막 잔디'도 장편이 되기를 바라는 독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작가 자신이 굳이 그렇게 소개를 할만큼 '오후의 마지막 잔디'는 매우 아련한 정경을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정원관리사가 되어 100평 정도 규모 정원의 풀을 산뜻하게 깎고 나서 땀을 식히며 석양을 바라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좀 더 일찍 이런 소망을 품었다면 이뤄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소망이긴 하다. 그래도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불가능한 꿈과 함께 '오후의 마지막 잔디'도 오래 내 마음에 남아 있으리라. 

이 글은 '제목 없음'이라는 제목에서 출발된 제목산문이었는데, 결국 제목소설이 아닌 소설을 열심히 소개하면서 끝맺음을 맺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어차피 우리네 인생이란 것도 제목 없이 시작된 이야기다. 과거에 정해놓은 무언가에 연연해하며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싶다. 

 

2014. 10. 14. 멀고느린구름. 

* 네 번째 문단부터 '오후의 마지막 잔디'가 제목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던 분들은 아주 훌륭한 하루키의 독자이십니다.  

* '모자를 내려놓거나 내 생일선물을 잘못 사온 남자'의 제목이 거꾸로 된 것을 알아차린 분들은 아주 훌륭한 저의 독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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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행 슬로보트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4-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하루키 문학의 경이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그 시원을 보여주는 첫...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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