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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상 영원한 망작을 위한 변론 

* 이 글은 2002년에 쓰여졌습니다.



지난 추석 연휴기간을 이용해 종로3가쯤에 자리잡고 있는 극장을 찾았다. 오랜만의 영화 지난 추석 연휴기간을 이용해 종로3가쯤에 자리잡고 있는 극장을 찾았다. 오랜만의 영화관 나들이였다. 하늘은 조금 끄느름하니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고 있었지만, 나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하 '성소')'을 보러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추석기간인지라 인파는 없었고, 매우 한가로운 기분으로 극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좌석을 찾아 착석했고, 추석 탓인지, 영화 탓인지 매우 산산한 분위기에서 다른 관객 12명과 함께 나는 영화를 관람했다.(관객 수 헤아리기가 참 쉬웠다.) 그리고 나는 보리수 아래에 요가자세처럼 똬리를 틀고 대각(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싯다르타처럼 하나의 각을 얻었다. 이제부터 그 소소한 앎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아 보고자 한다. 

 

세간의 중론은 광기에 차 있는 듯 하다. 여기저기 사이트들을 여행해본 결과, 사람들은 너도 나도 성냥팔이 소녀를 얼어죽게 하는 이 게임에 필사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게임 속에서가 아니라 게임 외부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사람들은 이 게임에 철저히 외면하기로 단합을 한 듯 하다. 허나 그들은 과연 이 게임(영화)의 승리자가 되고나서 그 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게임에 진 꼬마가 깽판을 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난 '성소 게임'의 승리자일지도 모른다. 사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 흥미진진한 게임을 통해 여러가지 앎을 얻었으며 그 앎을 조금은 나누어줄 수 있는 재주가 있다. 그러니 내가 이 게임의 승리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이 성소 게임이 굉장히 조잡하고, 돈만 쳐바른 뒤, 헛소리만 해대는 삐끕 영화라고 아주 저주를 퍼붓고 있다. 아이고. 내가 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다. 

 

"번지수를 좀 잘못 찾으신 것 같습니다"

 




시네21이라는 잡지의 시시껄렁한 별점이나 주면서 꽤 잘나가는 영화평론가들은 성소 게임에 별 두개나 별 두개 반씩을 나눠주었다. 그렇게 욕하면서도 꽤 많이 준 편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 영화 평론가들은 진정 이 게임의 플레이어였던 것일까? 나는 그것이 의문이다. 평론가란 직업은 어쩔 수 없이 제3자다. 그들은 창작자도 아니고 피창작자도 아니라 그 주변에 머물러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이 게임을 하면서 불쌍하게도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 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관조적인 눈으로 게임 외부에서 게임을 바라보았을 게다. 즉 그들은 '주' 가 아니라 '시스템'의 입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가 '주' 였다. 버젼3의 해피엔딩을 달성한 하나의 게이머였다. '성소 게임'의 엔딩은 총 세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이건 게이머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직접 보아야 더 재밌을 것이다.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 세 엔딩의 선택권은 감독이 아니라 전적으로 게이머에게 있다. (이것은 세계 영화사상 유래가 없는 획기적인 실험이라는 것을 우리는 얕잡아봐선 안된다.)

 

'주'라는 별볼일 없는 짜장면 배달부는 성소라는 게임에 접속해서 이 세가지의 엔딩 중 하나를 보게 된다. 엔딩을 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게임의 목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이 엔딩이라는 것이 결코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게이머 스스로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이 엔딩은 수만가지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불교에서의 '연기(緣起. 원인에 따라 결과가 생긴다.)'와 같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미래는 너무나 다르게 변하는 것이다. 여기서 삶과 게임(가상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다른 점이라면 게임은 리플레이가 되지만 삶은 리플레이가 힘들다는 것이다. - 윤회라는 개념을 빌리면 리플레이가 가능하지만 그 경우 인물과 배경이 바뀔지도 모른다. - 

 

'성소'를 보면 처음에 성냥팔이 소녀의 슬픈 모습이 화면에 비추어지고,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현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자 현실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성냥팔이 소녀가 등장해서 컴퓨터 그래픽의 눈이 쏟아지는 곳을 떠돌 때부터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영화 속의 현실은 게임이며, 그 게임이 곧 영화전체의 현실이다. 둘 사이의 선후관계는 모호해지며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마치 장자의 꿈과 같이. '주' 가 나비를 보기 이전부터 꿈이었던 것일 수 있고, 그 이전은 진짜였는데 나비 이후부터 꿈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게임을 하고 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모든 것은 게임이다. 하지만 '주'는 라스트씬에서 친구'이'의 총에 맞고 피를 흘리며 말한다. 

 

 "이게 게임이야!?"

 




그렇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이다. 언제나 가상세계를 살았던 프로게이머 '이'에게 현실과 게임이 뒤엉켜버리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초반부 현실의 세계에서 시스템에게 고용되고 가상의 세계에 등장하지만, 결국 두 세계 사이의 경계는 없고 둘은 같은 것이다. 모두가 하나의 게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게임은 시스템이라는 절대적 존재(신과 같은)에 의해 조절된다. 허나 이 시스템 또한 그것을 구축한 '추풍낙엽' 이라는 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창조물은 창조자를 소외시킨다. 마치 인간이 만든 종교가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과 같이. 인간이 만든 종교는 인간으로부터 떠나서 신격화되고, 그것 자체가 인간을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녀와도 같은 성냥팔이 소녀가 게임의 중반에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학살하게 되는 것은, 마치 단테의 신곡에서 천사 루시퍼가 신에 저항해 사탄이 되는 것과 흡사하다. 시스템이 만든 성냥팔이 소녀가 시스템에 대항한다. 이것은 성냥팔이 소녀가 스스로의 자의식을 얻고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난 주체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성냥팔이 소녀는 가녀린 모습으로 악마가 되어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를 모두 제거한다. - 신의 이름을 빌려 고아 및 미혼모의 노동력을 착취하던 여인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에서 이 메세지는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여인이 성당 같은 곳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성소가 기관총으로 죽여버림. - 게임 속의 사람들은 그런 성냥팔이 소녀의 모습에 열광하고 그녀를 아이돌스타로 만든다. - 이것은 또 하나의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 이것은 우리 현실의 대중들과 다를 것이 없다. 게임이지만 현실인 것. 가상현실의 문제가 결코 간단하지만은 않음을 보여준다. 

 

'주'의 게임에서의 목적은 성냥팔이 소녀를 동화처럼 얼어죽게 만드는 것이지만, '주'는 성소를 사랑하게 되고 - 이것은 현실에서 그가 좋아하던 여인과 성냥팔이 소녀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게 되지만, 사실 그 현실도 게임의 일부분이다. 시스템에 의해 성소는 게이머들이 평소에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나 싶다. 결국 성냥팔이 소녀는 허상이다.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는 그 허상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찾고자 하는 '버그'를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제도적 규율이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아를 찾고자 하는 행동이 사회라는 시스템 혹은 종교라는 시스템에 의해서 '일탈'로 치부되는 것과 같은 맥락 - 결국 그녀를 구하게 된다. 성소 게임은 '주'와 '성냥팔이 소녀' 이 두 사람의 바이러스와 버그로 혼란스러워진다고 보여진다. - 마치 우리의 안정된 사회가 특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나 이단자에 의해 불안정해진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

 

하지만 우리가 가치를 생각해본다면 과연 성냥팔이 소녀를 얼어죽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를 구하는 일이 올바른 것인가?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과연 바른 길을 요구하는가? 그릇된 일에 탐닉하도록 요구하는가? 

 

성소 게임의 재미난 점은 이 게임에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냥팔이 소녀의 사랑을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랑'. 우리 인류가 그토록 갈구하는 '사랑'. 하지만 시스템은 이 '사랑'을 얻되, 성냥팔이 소녀가 얼어죽게 내버려야 두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사랑'인가? 그것은 단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작이 아닌가? 성욕에 이끌려 상대와 하룻밤 자기 위해 농간울 부리며 싸구려 사랑을 고백하는 고작 그런 것은 아닌가? 우리 인류는 진정 사랑을 하고 있는가? 승리자가 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녀의 사랑이고 싶다.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가! 성냥팔이 소녀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을 시스템에 의해 원수로 알고 그를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뒤늦게야 그의 진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살'을 시도한다. '죽음' 이라는 생명체가 시도할 수 있는 최후의 자기표현을 하는 것이다. 성냥팔이 소녀는 외로웠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자기가 사랑할 사람이 필요했다. 허나 시스템에 의해 이 둘 모두 잃어버렸다. 제기랄! 빌어먹을! 

 

그러나 하나 남았다! 바로 '우리', 플레이어 '주(주라는 말은 주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진다)'이다. 이제 플레이어만이 성냥팔이 소녀를 구하고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게임 속의 '주' 일 수도 있고, 현실 속의 바로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용기를 내어 그녀의 사랑을 구하라! 인간은 외롭고 슬프고 춥고 고통스럽다! 허나 그것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바로 사랑이다. 그 사랑이란 가준호같이 시스템이 심어준 우상이 아니며, 성냥팔이 소녀의 손에 죽은 그처럼 마냥 바라보고 꿈을 키우는 사랑도 아니다. 그 사랑은 바로 '주'와 같이 시스템에 거부하면서까지 용기를 내어 끝까지 끝까지 '구하여' 들어가는 사랑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랑이며, 스스로와 세계와 싸워 이겨 얻어내는 사랑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우리에게 그 사랑을 쟁취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내면의 나약한 나와 싸워 이겨 우리 앞의 혹은 내 안의 허상을 버리고 진정으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나비의 꿈에서 깨어나 모든 거짓된 것을 버리고 오로지 진리(사랑)하나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하나의 앎을 얻을 때 그동안 스쳐지나온 모오든 영화 속의 환상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질 것이다! 영화는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엔터테인먼트이고 께임이며, 하나의 허구일 뿐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해피엔딩 역시 어떤 하나의 시스템으로부터 주어진 행복한 환상에 불과하다. 성소는 그 점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주' 가 나비를 쏘아 떨어뜨렸을 때, 우리의 모든 환상은 끝이 난다. 거기서 께임은 끝이다. 우리는 이제 진정한 현실로, 게임의 플레이어가 아니라 진정한 존재체인 나로서 돌아와야하는 순간이다. 게임은 끝이 나고 영화의 해피엔딩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영화이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햇살을 등지고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판타지'이다. 

 

그대가 진정한 성소 게임의 승리자라면 그 마지막 허상마저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주' 가 나비를 쏘아버리는 동시에 당신의 꿈도 깨어나고, 당신은 당신의 현실에서 사랑하는 그녀 혹은 그를 향해 달려가야할 것이다. 사랑을 '구하여' - 인간의 세계는 연기의 세계이다. 내가 한 일에 따라 결과가 온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한 아름다운 맺음은 있을 수 없다. - 야 할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그것이다.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종교는 오직 '사랑'이다!

 

2002. 9. 23. 멀고느린구름.


* 2014년의 뱀발 : 내가 이 글을 쓴 후로부터 1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 영화에 대해 이 정도로 장문의 후한 평가를 남기고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상세한 해설서가 필요한 영화라는 게 사실 대중영화로서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오히려 그냥 <금강경> 한 권을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2)

Resurrection of the Little Match Girl 
3.1
감독
장선우
출연
임은경, 현성, 김진표, 진싱, 명계남
정보
액션, 판타지 | 한국 | 125 분 | 200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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