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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불러낸 풍경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 이후로 타인 앞에서 목놓아 울어 본 적이 딱 한 번 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09년이었는지, 2010년이었는지 정확하지가 않다. 당시 만나던 연인의 집 거실이었고, 어떤 일을 계기로 나는 내 전 생애를 통틀어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을만큼 서럽게 울었다. 내가 운 이유는 하나였다. 나 자신이 너무나 증오스럽고 또 한편 안쓰러워서였다. 당시 만나던 연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아꼈었다. 내 인생에 더 이상 좋은 사람이 나타날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예민한 성격 탓에 자주 그녀를 당혹케 했고, 종종 내 멋대로 행동하고는 했다. 그러고서 뻔뻔하기라도 하면 바람둥이 노릇이라도 할 텐데 나는 정작 그러지도 못해서 연인을 상심케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다시 만날 때까지 몇 번이고 자책을 하고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다시 만나면 마찬가지인 상황이 반복됐다. 타고난 성향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그녀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있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겠다는 말을 늘어놓곤 했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단지 나라는 사람은 나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날의 대성통곡은 일종의 사랑불구자로 태어난 나 자신에 대한 증오와 연민의 의식이었다. 그녀는 그런 나의 증오도 연민도 온전히 이해하거나 해결해줄 수 없었다. 나 역시 머릿속에서 그리는 것만큼 그녀를 충분히 사랑해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모질게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그녀가 부른다>에서 윤진서가 연기하는 진경은 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나는 진경처럼 세상사에 무심하지도 않고, 그리 냉소적이지도 않으며, 사람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며, 비교적 누구에게나 친절한 편이다. 진경과 똑같은 말투로 말하며, 비슷한 형태로 세상을 대하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모종의 유대감을 느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고, 쉽게 속내를 털어놓고는 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서로의 깊은 마음 속에 닿을 수 있었던 걸까.
진경은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가 죽었을 때 울지 못한다. 그리고서는 울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통곡한다. 나는 순간, 스크린 속에서 지난날의 나를 보게 되었다. 연인의 거실에서 고작 자기자신을 위해 통곡하고 있는 나를. 그 울음의 가벼움이 다시 울음을 연발하고, 울음은 연민과 분노로 뒤범벅되며 비명처럼, 혹은 곡소리처럼 변해간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울고 있는 걸까 라는 질문은 점차 사라지고 울음 자체가 힘이 되어 온 몸과 마음을 흔들게 된다. 그래, 울어보자. 이 참에 다 울어보자 싶은 심경이 된다. 그렇게 울고 나면 나도 세상도 달라져 있을까.
물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진경은 참아왔던 감정 표현도 해보고, 진심을 털어놓아 보기도 하고, 자기를 좀 고쳐보라고 직언을 해보기도 한다.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의 진심이다. 진경의 드라마틱한 비극성에 호의를 보이던 남자는 정작 진경의 진심 앞에서는 도망을 친다. 진경의 무관심 앞에서는 열의를 보이던 남자가 진경의 요청 앞에서는 냉정한 현실을 바라본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노래하는 것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부르는 것뿐이다. 그녀의 양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불륜의 상대는 사랑이 뭐 대단한 거냐 싶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다. 대학 동창인 친구는 필요할 때가 되면 '뮤즈'를 들먹이고, 여고생 소녀는 벌써부터 계산을 통해 사랑을 셈하며, 살아낸 세월과 전혀 무관하게 성숙하지 않은 노인은 유치한 승부를 걸어온다. 참 따분한 삶이다. 따분한 것을 따분하지 않다고 말하도록 강요 받는 삶을 우리는 대부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진경은 단지 따분한 삶을 따분한 그대로 받아들이며 따분해하고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열을 낸다.
엊그제 광화문에 위치한 스폰지하우스라는 조그만 상영관에서 <그녀가 부른다>를 보고 나오는 길에 내 마음은 입을 다물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현행범이 된 기분이었다. 진경의 모습은 아마도 내 내면의 풍경일 것이었다. 겉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우리지만 진경과, 그리고 진경을 닮았다는 그 사람과 나는 참 닮았다. 어린시절 여러 모로 불행한 환경에서 자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세상과 사람을 관조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삶이든 그 속의 사람이든 내가 그리는 큰 그림 속의 부속물로 여길 뿐이었다. 인생은 뻔했고, 내가 겪은 고통과 외로움을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의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열심히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 사랑은 배타적인 사랑이 되어버렸다. 타인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나는 역설적으로 누구도 나 자신보다 나를 사랑할 수는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타인이 내게 주는 사랑은 전혀 만족할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알지 못했고, 그리고 언젠가는 변할 것이기 때문에.
자가발전을 시작한 발전기에게 더 이상 외부의 전력공급은 필요치 않게 되는 것처럼 지나친 자기애는 오히려 자신 주위에 견고한 성벽을 만들고, 점차 자기만의 왕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왕국은 지속가능한 에너지로 영구히 작동하는 무한 나르시시즘의 세계다. 필요한 만큼의 지적 허영과 생계를 꾸릴 수 있을 만큼의 능력, 최소한의 인간관계만 있으면 족하다. 나는 내 속에 이미 그런 세계를 구축해놓고서 마치 대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행세해 왔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마치 개츠비의 성과 같다. 제이 개츠비가 자신이 만든 거대한 세계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은 부유한 귀족도, 심지어 데이지도 아니다. 그는 상처받았던 과거의 자신을 데려와 회복시키고 싶었을 뿐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부른다>는 고립되고만 인간의 이야기다.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 옳지도 않았지만 결코 틀리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바뀌어야 할까, 그대로 살아가야 할까. 그녀의 노래는 쓸쓸하게도, 희망적으로도 들린다.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에게는 어떻게 들리느냐고. 글쎄... 좀 더 살아봐야 알 것 같다. 그리고 문득,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
2014. 1. 2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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