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뮤지엄 아워스 (2014)

Museum Hours 
7.8
감독
젬 코헨
출연
메리 마가렛 오하라, 보비 조머, 엘라 피플리츠
정보
드라마 | 오스트리아, 미국 | 106 분 | 2014-01-23
글쓴이 평점  


우리는 누구나 한 점의 그림 속에서 살아간다 



지루하고 흥미로운 영화였다. 그런데 지루하다는 것과 흥미롭다는 것이 양립 가능한 말인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멈춰진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에 반해 생동하고 다이나믹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종종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들러보기는 하는 편이지만 특별히 애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체로 지루하다고 느낀다. 허나, 잠깐의 지루함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명한 전시회에 가면 여러 작품을 보기보다는 흥미를 끄는 하나의 작품에 담긴 것들을 꼼꼼히 보는 편인 것이다. 


<뮤지엄 아워스>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초반의 전개를 지켜보면서 이 작품을 <비포 선라이즈>와 비견되는 작품으로 소개한 카피라이터를 불러세워 따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졸기까지 했다. 하지만 잠시의 휴식(?)이 약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차분히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는 박물관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노인(요한)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요한이 관찰한 관객들의 모습, 그리고 그 관객들이 바라보는 그림들, 특히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 브뤼겔의 작품들이 자주 언급이 된다. 극 초반 영화가 내게 지루하게 느껴진 것은 흡사 인터넷 미술강의를 보는 것과 같은 작품 해설과 정적인 화면들이 반복되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체 이야기는 언제 시작되는가 하고 마음 속으로 불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 영화는 이미 처음부터 매우 분명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는 누구나 한 점의 그림 속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미술관 속에서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은 누군가에게는 옛 귀족들의 사치품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그림 속에 들어 있는 모습들은 분명 당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딴청을 피우는 사람들, 위대한 역사 속에서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주변부의 사람들, 옷을 입거나, 벌거벗거나, 태어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 그림 속에 담겨 있다. 


<뮤지엄 아워스>는 단순히 옛 미술 작품의 우수성을 강의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한 점의 미술 작품 해설이 전개되고 난 후에 카메라는 현실의 거리를 비춘다. 거리에 떨어진 하찮은 종이조각 같은 것들,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거리의 보통 사람들, 익숙하게 보고 지나쳤을 건물들, 그 모든 장면들을 정적으로 마치 그림의 한 장면을 걸어보이듯이 선보인다. 카메라의 고정된 프레임은 그림의 액자틀과 같다. 프레임은 멈춰있지만 그 속에 담긴 사람의 삶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한 사람이 가면 다른 사람이 오고, 주인공 뒤에는 반드시 우리가 흘려버리고 말았을 조연들이 비춰진다. 


영상카메라 프레임 속의 인물들이 움직이듯이, 어쩌면 이미 죽어버렸다고 생각한 옛 그림 속의 인물들도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명한 평론가는 그림 속의 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지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가 주인공이었을까.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을 감춘 채 옛 그림 속의 수많은 인물들이 자신의 사연을 들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한, 그리고 그와 우연한 기회로 가까워진 여인 안네는 그림 속에 숨겨진 조연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영화 후반부에 들어 안네는 한 그림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어둠 속에서 나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고. 그리고 그 어둠 속에는 무엇인가 있을 것만 같다고. 우리들의 삶은 결국 어둠 속에서 빛으로 나와, 빛의 한 철을 보내고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가는 일과 같다. 아름다운 그림도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삶도 빛의 선물일 것이다. 어둠과 어둠 사이에 있는 이 빛의 한 철 동안 우리는 누구나 자기 삶의 주연이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그림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 지레 겁을 먹고 먼저 나서서 자기 자신을 조연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누구나 한 점의 그림 속에서 살아간다. 먼 훗날 누군가가 한 점의 그림 속에 담긴 당신을 바라볼 때, 당신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읽게 되기를 바라는가. 지금 우리는 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2014. 1. 31. 멀고느린구름 






Comments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