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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헌책방 해프닝에서 대발견! 경제적인 분노와 울트라 매니아
최근에 재미난 일을 겪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도올 선생의 책에서 현 홍준표 경남도지사에게 해준 것이 분명한 자필 서명을 발견했고, 사진을 찍어 도의적인 책임을 물으며 트윗을 올렸다. 어느 정도 화제가 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신문 기사가 나고 홍 지사 본인이 유감 표명을 해야할 정도로 이슈가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홍 지사께 물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예(禮)와 격(格)이었다. 자기 소유의 물건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본인의 권리이고, 그 행위 자체를 문제 시 삼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내 트윗에 대한 이런 비판은 지당한 비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행위 자체에는 나 역시 문제가 없다고 본다.
단, 애초에 내가 문제제기한 것은 홍 지사의 행위 그 자체보다 그 행위에서 엿보인 예와 격이 문제였다.
먼저,'격' 부분을 이야기해보자. 홍 지사쯤 되는 공인(공적 투표에 의해 선출된)이라고 한다면, 그에 더해 '보수'를 표방하는 정치인이라고 한다면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좀 더 품격을 보여줄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즉, 서로 정치적인 의견이 다른 상대라고 하더라도 격식을 갖추어 도올 선생 쯤 되는 인물의 친필 사인본이라면 별도로 보관을 해두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예'는 도덕적인 판단을 이른 것이 아니라 책을 선물한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 부분이 미흡했음을 안타까워 한 것이었다. 책에 쓰인 도올 선생의 서명을 보면 획이 과감하고 힘이 넘쳐, 이 책을 선물했을 때의 자신감과 기대감이 역력히 드러난다. 홍 지사께서 관리상의 실수가 있었다고 밝혔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는 도올 선생의 그 자신감과 기대감은 허공으로 공중 분해된 셈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도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기 때문에 존경하는 스승님이 다른 이에게 이토록 존중 받지 못했다는 것은 무척 속이 상한 일이었다.
트윗을 올리게 된 소회는 이쯤에서 그치고, 좀 더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옮겨 가고자 한다. 트윗을 올리고 폭발적인 반응 - 무려 4일째까지 수 천명에게 리트윗이 계속되었고 수 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루에 1건 이상씩은 리트윗이 이루어지고 있다. - 이 일어난 것도 재미난 일이었지만 리트윗이라는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묘한 '집합적 이미지'는 더욱 흥미로웠다.
100회 정도 리트윗이 되었을 당시에는 그런대로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글의 본래 의미가 살아 있었다고 보여진다. 허나 어느 임계점 - 정확한 수치는 모르겠으나 리트윗 500회를 넘었을 즈음이랄까? - 을 넘어서자 더 이상 내가 쓴 본래의 글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고 말았다. 재밌는 현상이었다. 마치,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열심히 장작을 패서 쌓아올리지만, 불이 붙은 순간 장작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과 같았다.
때는 2000년, 문화대통령이라고 불리웠던 서태지는 오랜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 신곡 '울트라맨이야'를 선보여 사랑을 받았다. 아이돌 가수, 스타의 정점에 위치했던 그는 그 노래를 통해서 더 이상 자신이 '영웅'이 아님을,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각자 개인이 그 자신이 매니악한 영웅이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외쳤다. 이른바 개개인이 '울트라 매니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이번 리트윗을 통해 엿보인 '모닥불 현상'을 보면서 나는 서태지의 바람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매니아가 된다는 것은 자신만의 지식, 자신만의 연구가 축적되어 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리트윗 500회가 넘어가자 '예와 격에 대한 물음'이라는 장작은 이미 재가 되어 사라지고, 홍준표라는 개인 정치인에 대한 비난, 혹은 보수 정당인 새누리당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재기하고자 했던 것은 비단 홍준표 의원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정치인', 나아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지만 실로 '아무도' 그런 쪽으로는 옮아가지 않았다.
나는 조금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아, 이 사람들이 그냥 상대 진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는데 장작이 없었구나. 내가 그 장작을 제공했을 뿐이구나."
'영웅'의 출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군중들은 이미 너무 많이 들어버렸다. 그런 기대감을 표현하는 순간, 어디선가 슈퍼 꼰대가 날아와서 상투적인 문구로 표현한 사람의 지적 수준을 깎아내린다. 그러니 군중은 더 이상 '영웅'의 출현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주체적인 개인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훈련할 것이 많다. 아, 귀찮아.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딘가에서 화재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화재가 일어났다!는 '낭보'가 들려오면 재빨리 달려가 그간의 심경을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행위 - 이른 바 '리트윗', 또는 '좋아요' - 로 간편하게 해결하는 것이다. 별다른 큰 노력은 들이지 않으면서도 나도 그 불길을 내는데 '참여'했다는 위안감은 얻을 수 있다. 참, '경제적인 분노'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내가 세워놓은 장작 더미를 통해 일어난 대형 화재를 남의 집 불구경하듯 바라보면서 이런 '경제적인 분노'들에 대해 참으로 우려스러워졌다. 차라리 서태지가 '영웅'의 죽음을 섣불리 얘기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사람들은 '영웅'이라는 대리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가진 이야기를 하고자 했을 테니까. 허나 '경제적인 분노'에는 그 분노가 일으킨 열기와 권위, 힘만이 있을 뿐 명확한 메시지가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있었다가도 불꽃이 사그라드는 순간 메시지마저도 한 줌 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누구도 거기에 책임지지 않는다.
화재가 진압되고, 재만 남은 현장을 바라보는 군중의 마음 속에는 짙은 허무감만이 깃들 뿐이다. 역시 그럼 그렇지. 이것봐 우리는 역시 안 되네.
우리가 사는 세계에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해소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경제적인 분노'를 통해 단지 소모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소모되는 만큼 세계는 더욱 보수화되어 갈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제 단지 곳곳에서 일어나는 화재를 지켜보고, 적절히 통제해가며 개혁적인 이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경제적으로 해소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이야~ 역시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편이라니까 라며 즐거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사람의 생과 같이 늘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왔다. 최근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대자보' 열풍은 청년들이 드디어 '비경제적인 분노'를 하기 시작했음을 알리고 있다. 13년전 서태지가 노래했던 '울트라 매니아'들이, 자신 스스로가 영웅이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분노란 이성적 손익계산을 넘어선 행동이다. 경제적인 분노는 분노의 제스처다. 하지만 비경제적인 분노는 진짜 분노다. 정말 화난 거다. 분노의 대상이 되는 분들, 이제 정말 조심 좀 하셔야겠다.
2013. 12.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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