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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중세철학’ 요약 자료 



가. 그리스도 


1. 예수의 생애 


-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성장. 나사렛은 당대 문명의 교역지로서 외국인들의 출입이 많음. 

- 예수가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이지만 나사렛 지방의 특성상 여러 외국어들을 두루 들으며 자라남. 

- 성인이 되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광야에 나가 40일간 금식수행을 통해 자신이 사명을 깨달음.

- 12 사도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팔레스타인 여러 지방을 돌며 강연활동과 기적을 행함. 

- A.D 33년경 예루살렘에서 제자 유다의 배신으로 잡혀가, 반역 혐의로 빌라도 총독에게 사형을 언도 받음. (단, 누가복음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무죄를 선고)

- 장사 지낸 지 사흘만에 부활하여 12제자들을 축복하고 승천함. 

- 예수 승천 후 사도 바울과 예수의 제자 베드로를 주축으로 그리스도교(기독교) 생성.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의미 


- 예수(jesus) : 원래의 발음은 예수스, 이에수스에 가깝다. ‘여호수와’라는 히브리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 ‘여호수와’는 ‘여=여호와’, ‘호수와 = 구원’이라는 뜻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뜻한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흔하게 쓰이던 이름 중 하나여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어려움 발생. 


- 그리스도(christus) : 히브리어 ‘마쉬아흐’를 라틴어로 번역한 말. 원래의 발음은 크리스투스로 한국어로 음을 그대로 옮기면서 ‘크’를 ‘그’로 바꿔 발음하게 되었다. 원래의 말인 ‘마쉬아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유대교 전통에서 존귀한 사람, 위대한 자, 왕, 예언자 등을 뜻한다. 즉, ‘메시아’라는 의미.  

* '그리스도'라는 말을 중국어로 발음하면서 '기독(基督)'이라는 말이 생겨남. '기독'은 의미가 없는 한자어로 중국어로 '그리스도'라는 음만을 옮겨온 것. 이것이 이후 '기독교'라는 명칭이 됨.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둔 모든 종교를 통칭하는 말이며, 그 아래 항목으로 천주교와 개신교, 장로교, 예수회 등 다양한 분파가 있는 것. 



3. 4 복음서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복음서)


- 마가, 마태, 누가 복음서를 공통의 관점을 가진 복음서라는 뜻에서 ‘공관복음서’라고 지칭. 

- 요한 복음서는 편집 방향과 내용이 다른 복음서와 차이가 큼.

- 4 복음서 중 마가 복음서 가장 먼저 만들어짐. 

- 4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도서, 요한 계시록/묵시록 등을 엮어 신약 성경이라고 이름.

  * 신약(New tastament) 성경이란 ‘새로운 약속이 담긴 성경’이라는 의미. 


4. 공인 받지 못한 것들 


- 그노시즘(영지주의) : 초기 예수운동의 일파로 예수 속에 신이 잠시 깃들고 간 것으로 판단. 예수 개인보다는 예수가 영을 통해 말한 철학적 가르침에 주목하여, 그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려던 집단. 신비주의 등과 결합하여 영적인 삶을 추구. 이단으로 지목된 이후 사막의 수도원 등으로 옮겨가 비밀스럽게 명맥을 유지. 


- 도마복음서 : 공인 복음서에 채택되지 않았으나 여러 유물 등의 발굴을 통해 당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던 복음서로 판명. 예수의 가르침만을 담아 놓은 철학서로, 공자의 ‘논어’와 유사하다. 그노시즘 계열에서 애독되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마태와 누가 복음 속에 Q자료라는 형태로 포함되어 있음이 밝혀짐. 



나. 초기 그리스도교의 3대 성인 


1. 성 암브로시우스(339 ~ 397) 

- 교회를 국가와 별개의 독립된 기관으로 분리. 

- 자신의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에게 기부하여 민중들에게 인기.

- 정치적 힘을 발휘하여 황제보다 교회가 중심이 되는 사회의 토대를 이룩. 



2. 성 히에로니무스(347 ~ 420) 

- 불가타 성경을 번역하여 가톨릭 공식 구약성경을 제작. 

- 순수한 학자로서 성경을 연구하고 귀족 여성들의 순결한 삶을 강조. 


3. 성 아우구스티누스(354 ~ 430)

- 사실상 중세 기독교 시대의 1000년 가량을 지배한 사상의 토대를 확립한 철학자.

- 시간이 공간과 분리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인슈타인보다 먼저 생각함. 

-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한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데카르트의 생각을 먼저 고안. 

- 실천 위주의 내용을 지니고 있던 그리스도교 교리에 플라톤 사상을 결합시켜 그리스도교 철학을 수립. 

   * 플라톤과의 철학적 차이는 ‘최후 심판의 날’과 ‘육체의 부활’을 믿었다는 점 정도에 불과. 


- 예정조화설 :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떨어질 자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면,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 성직자는 신의 은총을 대리하는 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다. 중세 암흑시대 


1. 이단 논쟁 


- 아리우스(250 ~ 336) : 리비바 태생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성직자. 예수의 신성(神性)을 인정하지 않음 (그노시즘의 영향). 예수는 인간에 의해 잉태된 것으로 영원하지 못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이 아니다. 단지 예수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역할을 훌륭히 했을 뿐. 이단 판정 이후 이집트 지역에 아리우스주의 교회 전파. 


- 펠라기우스(354 ~ 418) : 영국의 수도사 출신. 인간의 자유의지 강조.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원죄가 씻어지며 천국에 이를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조화설에 정면으로 도전. 이단 판정을 받았으나 사후에도 민중들의 지지를 계속 받음. 이후 가톨릭 교회는 그의 사상을 변형하여 선한 일을 많이 하되 신의 은총을 함께 받아야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그의 사상을 일부 수용함. 


- 키릴루스( 375 ~ 444) : 수학을 공부한 여성학자를 미사 중에 화형 시킬 정도로 냉혹하고 원리 원칙에 철저. 라이벌인 네스토리우스에게 대립각을 세우기 위해 예수에게 신격과 인격이 동시에 존재함을 강조. 네스토리우스가 이단 판정을 받고 쫓겨나자 자신의 사상을 강화시켜 예수에게는 오직 신성만이 있다고 강조함. 예수의 인성을 부정한 꼴이 되어 역시 이단으로 판정됨. 


- 네스토리우스(? ~451) : 예수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 인간으로서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신성(神性)을 부정함.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 것으로 키릴루스에게 몰려 이단으로 판정 받음.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자리에서 쫓겨나 시리아 지방에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내세우는 교회들을 전파. 


- 요한네스 스코투스(815 ~ 877) : 아일랜드 태생. 펠라기우스의 사상 계승. 이성과 신의 계시 사이에 모순이 있다면 이성적 판단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 철학과 종교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참된 철학자만이 참된 종교인이 될 수 있다. ‘악(惡)’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다만 ‘선(善)’을 선택하지 않은 것 뿐이다. 성경의 창세기는 비유일 뿐이고, 창조는 매 순간 일어난다. 여러 이단에 가까운 발언을 했으나 프랑크 왕국의 샤를 대제의 총애를 받아 이단으로 분류되지 않은 채 생존. 



2. 문명의 암흑기 


- A.D 600 ~ 1000년 경의 서로마 지역은 당시까지도 수렵과 채취 를 위주로 살아가던 야만 유목민족에게 점령 당함. 대부분의 문명은 파괴되고 교회 건물과 그리스도교 성직자만이 살아남음. 이후 별다른 학문적 발전을 전혀 이룩하지 못한 채 종교만이 살아남아 이민족의 지배하에 어두운 시절을 보냄. 권력과 지식을 독점한 교회는 점점 부패하여 성직 매매, 성직자의 부정 축재, 성적 스캔들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여 이후 교회 개혁과 종교 개혁의 원인이 됨. 


- 한편, 동로마 지역은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 세력에게 점령당하여, 그리스도교는 세력을 상실함. 반면, 문명은 대부분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문화적, 예술적으로 다양한 발전을 이룩함. 



3. 이슬람 


- 부호의 집안에서 태어난 마호메트(무하마드)가 중년 이후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중 신의 계시를 받아 창시한 종교로서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와는 배다른 형제와 같은 종교. 

- 경전은 코란. 

- 성지인 메카를 탈환하기 위한 성전을 개시하여 동로마 지역 대부분을 점령. 거대한 이슬람 문명 제국을 건설함. 


- 서로마 지역이 플라톤 사상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그리스도교 철학을 발전시켰다면, 동로마 지역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입각한 실용적인 학문들이 발달. 

   * 아비세나 : 스페인 태생. 백과사전 최초 제작. / 아베로에스 : 신학, 법학, 의학, 수학, 철학 등 거의 모든 학문에 통달.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발굴하고 연구. 신의 존재를 이성을 통해서 입증하고자 함. 




4. 교회 개혁 


- 하인리히 3세(1017 ~ 1056) : 1046년 2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성직매매 죄를 물어 교황 그레고리우스 6세를 폐위.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과 경건하고 검소한 생활 강조. 당시 민중들의 열망과 일치하여 대인기. 자식인 하인리히 4세에게 권력 이양. 


- 그레고리우스 7세(1075 ~ 1085) :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강하게 선호.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음. 교황의 권력 대폭 강화하여 ‘황제 폐위권’을 손에 넣음. 스스로를 베드로의 대변자로 지칭. 성직자의 독신 생활 제도적으로 강제화. 결혼한 성직자의 미사는 무효라고 선언하여 당대 민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획득. 주교임명권을 두고 하인리히 4세와 대결하여 최초로 황제를 폐위시킴. 하인리히 4세가 자식들과 한겨울에 맨발로 서서 3일동안 자신의 폐위를 취소해 달라고 간청하는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 사건 발생. 이후 하인리히 4세는 복수를 위해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 하지만 노르만족의 갑작스런 침략으로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 모두 비참한 종말을 맞이함. 


 - 프리드리히 2세(1194 ~ 1250) : 1220년 즉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독일과 이탈리아의 왕도 겸임. 당시 동서양 문명의 총 집결지였던 시칠리아에서 자라나며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를 마스터하고, 이슬람교도 등과 친분을 쌓으며 수학과 기하학, 천문학, 과학을 공부함. 게르만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데다 아랍 및 서로마의 문명에도 조예가 깊음. 십자군 원정을 반대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와 대립. 분노한 교황이 프리드리히 2세를 폐위시키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아무렇지 않게 황제직을 버리고 예루살렘 왕의 외동딸인 아내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걸어가 대화를 통해 예루살렘을 손쉽게 탈환함. 곧 예루살렘의 왕이 됨. 이 사건을 통해 교회의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 정책은 우스갯거리로 전락. 교회의 권력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이성과 합리성을 내세우는 군주들이 출현하기 시작. 




5. 스콜라 철학 


- 교회의 지원을 받아 수도사가 되기 위해 성경 공부를 하던 이들 사이에서 철학적, 합리적 사고가 싹트기 시작함. 


- 안셀무스(1095 ~ 1109) : 영국 캔터베리의 주교. 성경의 문구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과 논리적 사고를 통해 신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주창. 스콜라 철학의 시조가 됨. <모놀로기온(독백)>과 <프로슬로기온(대화)>, 두 저서를 통해 성경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생각하는 것만으로 신의 존재와 신의 의지를 밝혀냄. 


  * 우리의 머리 속에는 ‘완전한 것’이라는 생각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들어 있고, ‘신’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완전한 것 그 이상은 도저히 생각해내려고 해도 생각해낼 수 없다. 무엇보다 크고 무엇보다 넓으며 무엇보다 깊고, 무엇보다 완벽한 그 무엇을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우리가 어떤 절대적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면, 그 존재는 분명 실재로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있을 수 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있는 것이다.”


   * 신에게는 죽을 수 없는 것, 거짓말 할 수 없는 것,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 이 세 가지의 무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능력 자체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다. 즉, 위에 말한 세 가지 사항은 ‘능력’이 아니다. 신은 쓸모없는 일을 할 필요가 없고, 오직 쓸모 있는 일만을 하는 ‘유능’을 지닌 것. 따라서 신은 전혀 무능하지 않다.  


- 성 프란체스코 : 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창시자. 스스로 선택한 가난, 청빈(淸貧)의 삶을 추구. 성직자는 집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 자신의 구원보다 타인의 구원에 더욱 노력하여 민중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음. 하지만 이후 후계자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프란체스코의 가치를 상실. 지나치게 가난을 강조하여 기득권 성직자들로부터 이단으로 공격 받음. 


- 성 도미니코 : 정통 신앙을 고수하였으나, 십자군 전쟁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 등 잔혹한 행위에 반대함. 정통 신앙을 고수하기 위한 방편으로 ‘청빈’을 강조. 프란체스코파와 청빈 경쟁. 이후 성 도미니코 수도회가 지원하는 그룹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배출함. 



2013. 12. 14.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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