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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자 - 배수아 지음/열림원 |
제목부터 결연한 이 책은 제목만큼 결연한 문장과 의지들로 가득 차 있다. 독학자는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의 폭풍 속에서 개인의 지적 충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나와 S의 이야기이다. 개별적인 가치들을 민주화라는 정치적 가치 아래 속박시키고 소외시켰던 80년대의 대학가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자유의 끝이 어디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독학자는 배수아라는 작가의 가능성과 잠재력이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었다. 그녀는 소위 잘 읽히는 (문장 길이가 짧고 속도감이 있는) 문체를 스스로 버리고, 복잡하고 몇 번 되풀이 해서 읽어봐야만 의미의 맥락이 잡히는 만연체를 스스로 선택했다. 몇 개의 비문이 눈에 띠기는 하지만 성공적인 시도였다고 본다. 그녀의 새로운 문체에는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오히려 이 독학자와 같이 사유로 가득 찬 소설이 짧고 즉물적인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싶다.
독학자에서는 여러가지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인간의 '자유' 에 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자유라는 것은 마치 민주주의의 부속물인 듯이 생각되고 있지만, 진정한 자유라는 것은 정치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완전히 독자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의존되어 있지 않는 그런 절대의 자유.
몽상가인 '나' 는 그 자유를 얻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억압적인 대학을 떠나, 정신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단순한 육체노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공부를 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S는 그런 자유를 얻기 위해 괴짜로서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둘 모두 사회로부터 이탈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신의 자유를 지키려한다.
그러나 독학자 속에서도 언급하듯 갑자기 모든 생명이 죽고, 지구에 나 혼자 남게 된다면? 거기에서 자유란 과연 무엇인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가 되었을 때 자유란 무슨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일까?
배수아는 그 물음에 답을 내리지 않는다. 마치 '나'의 어린시절에 있었던 책 강탈 사건에 대해, '나'의 부모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듯이. 대신 배수아는 나와 S 두 사람의 정신적 어버이였던 P교수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스스로를 표현했네.'
두 스무 살의 독학자들이 꿈꾸는 그 정신의 궁극적인 자유, 지식의 수집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들은 그들이 계획한대로 그들의 정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만 과연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괴짜이고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S도 전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어 본적도 없는 이성에게 감정적인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나' 속에 은폐되어 있던 S에 대한 사랑...
그러한 감정의 한계마저도 벗어나기 위해 완전한 고독, 완전한 은둔을 선택하려는 '나' 의 인생계획이 과연 그대로 실현될 수 있을까. 배수아가 던지고 있는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우선 '아니' 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독학자가 추구했던 '자유' 라는 것은 그 의미로부터 이미 자유롭지 않다. 언어화 된 것은 결국 얽매여 있는 것이다. 두 독학자가 자유를 추구하려는 그 순간부터 이미 그들은 '자유' 라는 사슬에 얽매여 버린 것이 아닐까. 그들이 책 속의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사유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언어의 세계에 묶여버렸다. 그러나 언어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를 그대로 담고 있지 않다.
자유라는 언어는 속박의 상대어일 뿐이다. 또한 속박은 자유의 상대어일 뿐이다. 두 언어 모두 현실에서의 진정한 자유와 속박은 담아내지 못한다. 삶이란 이분법적 언어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변수의 집합이니까.
또한 완전한 '정신'의 자유도 있을 수 없다. 정신이라는 결국 몸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다. 몸의 시스템을 떠난 완벽히 독립적인 정신이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미 '내' 가 아닌 상태이다. 나의 컨트롤이 미칠 수 없는 지점에 있는 것이다.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은 자유로운 게 아니다. 그것은 다른 세계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다.
독학자 속에서 '나' 는 '구어'에 대해 혐오감을 가진다. '문어'에 비하여 '구어'는 그에게 알 수 없고, 도무지 적응하기 힘든 언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피는 곧 '나' 의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간극이 그만큼 큰 것이다.
문어가 정신의 언어라면, 구어는 몸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두 독학자들은 세계를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파악한다. 개체와 전체, 자유와 억압,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정, 문어와 구어. 이들 이분법 속에서 이들은 개체, 자유, 정신, 이성, 문어를 추구한다. 그러면서 그 반대되는 요소들을 증오한다. 그리고 80년대 운동권으로 대변되는 이들은 그러한 그들을 증오한다. 흔히 이 두 가치의 극명한 대립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 쉽다.
허나 배수아는 현명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작가가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어야 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각자 자기가 딛고 있는 토양 속에서 생각해보아라. 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한 가지 군말을 붙인다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이분법' 은 모두 삶이라는 텍스트를 쉽게 읽히게 하기 위한 거짓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P교수의 말처럼 실로 인생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2005. 6. 2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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