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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의 업
2007년 봄부터 2008년 여름까지 문산 내포리 작은 숲속에 있던 행복한학교에서 교사로 지내며 참 행복했다. 4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다. 파주 출판단지에 있던 청미래학교와 합쳐져 12년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파주자유학교'가 된 행복한학교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먼 여정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다.
내게는 고질적인 질병이 있었는데, 바로 편두통이었다. 일주일 중 3일 정도는 편두통에 시달렸다. 온갖 동서양의 처방전을 두루 써보아도 한 때였다. 그러던 것이 행복한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다보니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제 난 편두통을 거의 겪지 않게 되었다. 나는 편두통을 내 평생의 지병으로 가져가야할 것이라 체념하고 있었다.
유년시절이란 어쩌면 하나의 사람이 평생 짊어지고 갈지도 모를 어떤 숙제들을 부여받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편의상 그것을 불교적 용어로 '업'이라고 표현하자. 모든 '업'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최종적으로 '몸'으로 나타난다. 내가 진 유년시절의 업은 편두통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제 그 결과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내가 진 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영국의 유명한 대안학교 써머힐의 설립자이자 교육철학자인 알렌산더 닐은 불안과 억압으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정당한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성장한다고 말했다. 즉, 교육은 아이들 자신이 스스로를 자유롭지 못하게 억압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일 따름이다. 그 이외의 것은 아이들 스스로 선택의 몫이다. 닐의 용어를 내 식으로 바꾸자면 교육이란 아이들이 유년시절 동안 불필요한, 또 부자연스러운 업을 짓지 않도록 돕는 일이다. 업을 지니지 않은 아이는 자신이 세상에 타고 난 모습대로, 쓰임대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나의 업은 내가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다는 기억이었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지 못했고, 버려졌고, 외면 당했고, 항상 후순위로 밀리는 아이였다는 기억. 그래서 인정받기 위해, 사랑을 받기 위해 있는 힘껏 애썼지만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랐던 부모는 나를 떠나거나, 오히려 내가 보살펴야 하는 위치가 되어버렸다는 기억. 내 마음에 깊게 새겨진 그 기억은 나를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사랑받지 못하거나, 사랑의 관계에서 항상 번민하고 고통스러워 하도록 만들었다. 나의 오랜 두통은 몸으로 나타난 유년의 아픔이었다.
행복한학교에서 아이들과 1년 반 정도를 함께 지내며, 내가 가장 깊게 깨달은 것은 사랑은 받으려고 할 때보다 아낌없이 주려고 할 때 더 크고, 더 따스해진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포장없이, 언어의 가공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를 갈망하는 아이들의 깨끗한 눈망울을 바라보며, 조그만 아이들의 몸을 힘껏 끌어 안아주며. 나는 되려 내가 어린시절 충분히 받지 못했던 유년의 사랑을 마음 속에 가득 채울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나의 오랜 업을 조금씩 조금씩 치유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내 속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어린시절의 내가 사랑받았던 기억들이다. 그런 일들은 없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던 내 이성적 판단 뒤에는 나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이 가려져 있었다. 아주 작은 사랑도 커다란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내게는 그런 확신이 생겼다.
두려움 없는 삶
봄부터 다시 아이들속으로 들어간다. 파주자유학교의 행복한과정(초등과정) 4,5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출사표라고 말하자면 거창하고, 소박하게 내가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자 하는 두 배움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두려움 없는 삶, 또 하나는 꿈이 있는 삶이다. 하나는 있어야 하고 하나는 없어야 한다는 참 어렵다.
‘두려움'은 자유를 막는다. 두려움은 자연을 거슬러 인위적인 일들에 집착하게 한다. 두려움은 또 자립을 유보 시킨다. 나는 어린시절 혹독하게 올바른 젓가락질을 강요 당했다. 어린 내 입장에서 훨씬 더 편하고 좋은 방식이 있는데도 부모님은 내게 합리적인 이유 없이 일반적인 젓가락 사용법을 강요했고, 심한 폭력도 가했다. 나는 점점 더 젓가락질을 올바르게 할 수 없었고, 부모님은 결국 나를 포기해버렸다. 내 젓가락질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포기’한 것이다. 그뒤 나는 조금 어려운 일을 대하면 곧잘 포기해버리는 성향을 지니게 되어버렸다. 괜히 무언가를 시도해보았다가 그것을 잘 해내지 못하면 부모님께 혼이 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내가 충분히 할 수도 있는 일들을 모두 시도하기 전에 포기해버렸고, 점점 말이 없고 위축된 아이로 자라났다. 결국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게 되어버렸다. 물론, 젓가락질 하나만으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그와 유사한 복합적인 사건들이 점점 내 속에 쌓여 갔던 것이다.
유년시절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떤 부모들이나 ‘두려움'을 갖는다. 이 아이가 과연 제대로 자라날 수 있을까. 올바른 아이가 될까. 조금 강요가 되더라도 이것만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건 이 아이의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저렇게 자라서 어떻게 살지. 숱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것은 ‘두려움'이 된다. 그 두려움은 아이의 두려움이 아니라 부모의, 혹은 교사의 두려움이다. 부모와 교사의 두려움은 아이의 두려움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두려움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아이한테 주입시킬 것은 다 주입시키고 보자는 막가파식 주입 교육의 철학이 된다. 이것도 가르치고, 저것도 가르치고. 아이의 성장 속도, 아이의 바람, 아이의 기호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무차별적인 가르침과 규율은 아이의 유년시절을 피곤하고 따분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모든 가르침은 결국 아이에게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 곳이니까 너의 모습을 세상에 끼워 맞추어 적응하며 살아가라는 암시가 된다. 영영 아이도 사회도 성장하지 못하는 악순환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아이를 바르게 교육해야 한다는 목적론식 교육은 또다른 강요와 두려움을 만든다. 한 아이가 자연스럽게 성장해서 구성할 사회가 반드시 지금의 어른들이 선호하는 사회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른은 소박한 기대를 품는 것 정도로 그쳐야지, 아이들이 만들 미래를 구세대가 디자인하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어른은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개입하는 것보다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현재에서 충실하게 자신의 가치를 구현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최선이다. 아이들은 어른이 가르치는 말을 듣고 배우지 않는다. 아이들이 진짜 배우는 것은 어른들이 지금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아이들은 진정 배운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두려움 없는 삶’을 가르칠 수는 없다. 단지, 나 자신이 그렇게 생활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얼마나 성장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배움의 정도가 달라진다. 내가 아이들 속에서, 아이들의 모습에서 더 많이 배우면, 아이들도 내 속에서 일정 부분 자신들이 배울 것들을 찾아갈 것이다. 내 속에 아직 잠재해 있는 몇몇 두려움들을 올 한 해 더 비워내고, 밝혀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의 두려움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 기다려주는 일에 힘쓰겠다. 내가 해낼 수 있었던 것처럼, 아이들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꿈꾸는 삶
유치원생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니 ‘교사, 공무원'이라는 답이 나왔고, 그 이유가 ‘안정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는 한 설문조사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있다. 교사, 공무원 모두 좋은 직업이다. 그 두 직업을 꿈꾸는 아이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다만,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미래라는 게 고작 이 정도라는 것에 초라해질 따름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 중 대평원 지역과 남동부 지역에 살았던 라코타 부족, 체로키 부족 등의 어린이는 13세 정도가 되면 혼자 숲이나 평원으로 여행을 떠난다. ‘비전퀘스트’를 위해서다. 비전퀘스트란 자신이 태어난 존재의 이유를 명상을 통해 깨닫는 아메리카 원주민들만의 성인식이다. 여행을 떠난 아이들은 한 자리를 정해 13개의 돌을 가지고 메디신 휠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며칠이고 단식을 하며, 자신이 지구에 태어난 목적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들이 ‘위대한 신비’라고 부르는 우주의 기운으로부터 힌트를 받아 인생의 목적을 결정하고 나면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평생 그 자기만의 목적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인도의 랍비나, 티벳의 고승들이 남긴 문헌들을 보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점이 있다.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에 자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배워갈 것인지, 그 목표를 결정하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 목표는 ‘이번 생은 욕심을 좀 덜 부리고 살아야겠어' 라는 것부터 ‘인류에 의학분야에 있어 큰 진전을 이루어야 겠어' 같은 것까지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윤회를 전제로 하고 있는 이들의 세계관에서 인간이라는 생명은 그렇게 여러번의 인생을 통해, 자기만의 과제를 클리어하며 점점 더 온전한 하나의 개체로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증명할 수 없다. 다만, 위의 이야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우리 삶에 건강한 관점을 부여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사실, 직업은 부차적인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살 것인가는 차차 선택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더 잘 할 수 있고, 결국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세상에 어떤 의미를 더하고 떠날 것인가 하는 것은 더 깊게 들여다 보아야 하는 문제다. 후자가 명백해져야 전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 실수가 없고, 실수를 하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할지 스스로 깨닫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다.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 경계없이, 거리낌없이, 편견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두루 해봐야 한다. 이옷과 저옷 중에 무엇이 내 몸에 더 어울리는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직접 그 옷을 입어보아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번 옷을 입어보다 보면 나중에는 직접 옷을 입지 않아도 눈대중으로 나에게 어울릴 법한 옷을 찾아내는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 꿈이 있는 삶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안목이 있는 삶이다. 삶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이 있는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교사로서 나는 아이들에게 먼저 앞서 불가능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교사가 불가능한 것이지 아이들이 불가능한 게 아니니까. 아이들도 스스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은 분별할 능력이 있다. 경험상 우려처럼 터무니 없는 일을 시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들, 찾아내고, 발견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함께 탐구하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 점은 당연히 인지교과 수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공부에 대한 두려움, 공부를 하지 못하면 낙오된다고 하는 세상에 대한 공포가 오히려 아이들을 공부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지식을 배운다는 일 그 자체는 순수하게 즐거운 일이다. 기존의 어른들이 훼손(?)해놓은 공부의 참된 의미와 즐거움을 회복시켜주고 싶다. 물론, 그 또한 내가 먼저 공부하고, 탐구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다시 아이들 속에서
간단하게 두 가지의 배움을 언급했지만, 두 가지를 배우는 과정에서 더욱 더 많은 여러가지의 배움들이 있을 것이다. 일반 대중의 눈에서 보자면 어째서 조기교육의 중요성이나, 언어학습의 필요성, 수학 기초의 절실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냐고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우리네 사회가 이미 본말이 전도된 속에서, 먼저 배워야할 것과 그 후에 따라오는 배움들을 서로 뒤집어 놓은 교육을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후에 자연히 따라오는 배움을 먼저 교육하게 되면 먼저 배워야할 것은 절대 배워지지 않는다. 수학과 국어, 영어교육이 자신의 중심을 잡고,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자립하여 살 수 있도록 한 인간을 성장시켜주지 않는다. 그런 거꾸로 된 배움은 지속성이 없다. 학창시절이 끝나면 우리는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오직 먼저 배워야할 것들을 배운 이후라야먄 인간은 그 스스로의 요청에 의해 자신이 필요한 것들을 배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배움의 습관은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이다.
특히, 유년시절의 내부의 에너지를 키울 시기이다. 혹여 이미 스며든 어둠을 내몰고, 자기 내부의 빛을 밝혀야 할 때이다. 그 빛을 교과서와 두려움과 억압으로 턱턱 막아버려서는 안 된다. 제 속에 빛을 키우는 아이들은 빛을 가진 어른을 따르기 마련이다. 제 속에서 어둠을 키우고 있는 아이들은 어두운 어른들에게 점점 둘러싸이고 만다. 아직 어린 아이들일 수록 그 마음에 어둠이 덜 스며들어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빛을 보여주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 속에서, 아이들의 눈높이로, 아이들의 자유와 자연 그대로를 인정하고 기다리며 내 속의 빛을 가꾸어 가는 어른이 되고자 한다. 올해 교사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의 변함없는 목표다.
2012. 1. 2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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