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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행복이란 무엇인가

멀고느린구름 2010. 10. 11. 23:41

최근 행복전도사라 불리던 최윤희씨의 자살로 설왕설래가 많은 것 같다. 먼저 돌아가신 최윤희씨 부부의 명복을 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은 최윤희씨에 대한 글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가 한 번 돌이켜보아야 할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무수한 의견 중에 하나의 생각을 더한다. 

사람들은 최윤희씨의 죽음에 슬퍼하고 한 편으로 분노하며 실망하고 있다. 왜? 그녀가 행복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지 않아서다. 물론, 여기서 행복한 결말이란 최윤희씨의 삶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한 결말이다.  사람이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실망한다. 때로는 분노한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이며 최윤희씨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이 자연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우리가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떠올려보자. 행복한 결말이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식들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주고 떠나는 것? 대통령이라든가 유엔 사무총장이라든가 세계를 움직이는 엄청난 권력자가 되어 세계 인명 사전에 이름 한 줄을 남기고 떠나는 것? 그것도 아니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큰 탈 없이 제 수명대로 무난하게 살다가 조용히 떠나는 것? 무얼까. 도대체 행복한 결말이란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행복한 결말은 없다. 인간의 자연에는 오직 '죽음'이라는 명징한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한 생명의 죽음에 대해 행복과 불행을 논하는 것은 단지 해석의 문제일 따름이다. 어떠한 사람의 시각에서는 행복인 것이 어떤 사람에는 불행이 되고, 그것이 또 다른 사람에 의해 다시 역전되기도 한다. 해석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수 만가지의 눈과 이야기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런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것에 '행복한 결말'이라는 공통의 명칭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자살은 행복한 결말이 될 수 없는가? 자살은 오로지 불행한 것인가. 우리 모두가 청교도주의에 열광하는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라면 고개를 저을 수도 있는 문제이다. 자살하는 것이 최선일 때가 있고, 심지어 아름다울 때도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숱하게 자살을 찬미해 왔다. 논개의 자살, 한일 강제병합 후의 사대부들의 자살, 정절을 지키는 여인들의 자살, 로미오와 쥴리엣의 자살. 그 자살들은 비극을 넘어 아름다움과 긍정을 만들었다. 어떨까? 그것은 행복한 결말인가 불행한 결말인가.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다. 라고 하는 명제가 21세기 초반의 중심 이데올로기가 되어 가고 있다는 본다. 과거 인간은 신에게 복종하기 위해 태어났다든가, 왕의 충실한 심복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던가, 노동을 위해 태어났다든가, 부와 명성을 쌓기 위해 태어났다는가 하는 말들보다는 썩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다. 지나치게 세속적이지도 않고 불순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비슷한 용법인데도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났다 라는 말보다 쉽게 말해 착해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는가? 우리가 이 명제를 진실로 만들기 위해 몇가지 명확히 해두어야할 전제 조건이 있다. 

첫째, 인간이란 누구를 지칭하는가. 우리 모두를 말하는가. 지구의 인류 전체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인가. 자 그럼 인류 전체를 만족시킬만한 행복의 표준이 무엇인가. 그 전에 우리는 어떤 존재를 인간이라고 표준 지을 수 있는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로 단순화시킬 수 있는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절대로 인간이라고 한정 지을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가 인간은 이러이러한 존재이다! 라고 정의하는 순간 실재하는 대부분의 인간은 그 정의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둘째, 인간은 태어날 때 어떠한 목적을 그 유전형질 속에 저장한 채로 태어나는가. 쉽게 말해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아직 명확히 답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사람은 윤회를 하며 환생할 때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자기가 태어날 곳과 그 부모까지도 골라서 탄생한다고 말한다. 먼저 말하자면 불교적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다.  불교적 인간은 저마다의 다른 목적을 가진 다양한 존재이다. 물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그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태어나는 존재도 분명 있다. 그러나 고통을 얻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도 있고, 부를 위해 태어나는 존재도 있으며, 이것과 저것을 모두 떠난 마음의 균형 상태를 얻기 위해 태어는 존재도 있다. 

우리는 쉽게 '행복'이라는 단어 속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여 온갖 것들을 그 범주 속에 포함시킨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해진 답을 얘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마음 상태는 오로지 그것을 느끼는 존재의 그 느낌의 순간에만 잠시 빛을 드러냈다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행복을 추구하는 동안에 인간은 끊임없이 불행하다! 숱한 불행을 견뎌야만 인간은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고, 공부해야 하고, 경쟁해야 하며, 행복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한 쪽의 행복이 다른 한 쪽에게 불행한 것이 되고, 누구에는 행복한 사회가 어느 한 편에게는 끔찍하게 불행한 사회가 된다. 

정의로운 사회는 행복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정의로운 사회는 정의롭지 않은 이들에게 너무도 불행한 사회이다.  전쟁이 없는 사회는 행복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전쟁이 없는 사회는 전쟁광들과 군수용품 직원들에게 불행한 사회이다. 

행복해져야 한다고 날마다 외치는 사람은 영원히 그 행복을 곁에 두어 보지도 않고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행복이며, 무엇이 행복이 아닌지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온도를 잴 수 있는 온도계를 만들고, 감정의 온도가 100도를 넘으면 그것은 행복의 영역, 100도 이하면 그저 그런 상태라고 누군가 계량화하여 알려준다면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지닌 감정의 온도는 저마다 너무나 달라서 어떤 이에게는 10도만 넘어가도 행복의 영역이고, 어떤 이에게는 10000도가 넘어가도 행복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에 도달해야 하는가. 10도인가? 100도인가? 아니면 10000도인가... 

또 하나의 얘기를 해보자. 자, 나는 지금껏 행복을 추구해왔고 열심히 노력하여 내가 원하던 100도 이상의 영역에 진입했다. 아, 정말 좋다. 나는 행복하다.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1년 정도 말하는 순간 인간의 감정 온도는 100도를 표준으로 인식해버린다. 바라던 행복을 찾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바랄 필요가 없는 행복이 되고 만다. 이미 내 곁에 주어져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더 높은 1000도의 행복을 얻기 위해 100도의 행복을 불행으로 개명하기로 한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다시 불행한 사람이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해서 다시 1000도의 행복을 얻고, 그 다음에는 다시 10000도의 행복을 얻기 위해 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죽는다. 이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행복한 결말이란 건가. 

나는 10년 전에 내가 관리하던 카페에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들로 인해 불행이 만들어진다고 말하여 행복에 대한 추구에 부정적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어서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일은 나에게 큰 관심꺼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불행해지고 싶다는 것 또한 아니다. 

나는 성숙한 인간이란 평형을 잘 유지하는 인간이라 본다. 인생에서 불행과 행복은 동전의 양면이라 어느 한 쪽을 잘라내고 다른 한 쪽을 취할 수 없다. 인간의 삶에 불행이 없다면 우리는 행복의 감각을 느낄 수 없고, 마찬가지로 행복감이 없다면 불행감도 알 도리가 없다. 행복과 불행은 단지 인간이 느끼는 감각의 종류일 따름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가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불행한 삶, 객관적으로 행복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주관적인 판단과 해석의 의지에 따라 재구성될 뿐이다. 지나치게 불행한 인간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미세한 행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행복한 인간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미세한 불행에 무너진다. 

물리학에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작용한 것과 동일한 반작용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 이 법칙이 말하는 우주의 질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라든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정의 같은 것도 같은 원리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 행이 있으면 불행이 있고, 불행이 있으면 행이 있다. 생명체의 삶은 무수한 사건의 굴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굴곡이 없으면 감정과 언어표현이 생겨날 수 없다. 

21세기 사회는 온갖 불행한 이야기들과 온갖 행복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이 이야기들은 언제나 있던 이야기들이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그 이야기들을 더욱 더 접하기 쉬운 구조로 발전해간다. 이러한 시대를 연 첫 명제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좀 더 현명해지고 좀 더 불행의 리스크가 적은 사회를 지향하고자 한다면 지나친 행복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특권층이 가진 지나친 행복을 감소시킬 때 오히려 우리 지구 전체의 적정한 불행과 행복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준 선진국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또는 미국인들에게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났다.'라는 말은 그럴싸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목숨과 내일의 죽음을 고민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지구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시대의 현실을 좀 더 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는 말한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 말지어다. 단지 불행을 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려 애쓸 뿐. 



2010. 10. 1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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