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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마지막 출근

멀고느린구름 2020. 4. 17. 11:10

4월의 첫 비가 내렸다. 비 냄새가 솜털 같은 것을 보니 지금이 봄이었구나 싶다. 코로나19는 결국 직장을 문 닫게 만들고 말았다. 더 이상 언제 출근할 수 있으려나? 하는 불안정에는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홀가분하다고 해야 할까. 

 

20대를 마감하며 직업 군인을 첫 직업으로 가졌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내 가장 오랜, 그리고 가장 안정적이었던 직장생활이 되고 말았다. 이후 대안학교 교사를 2년 반, 까페 관리인을 1년, 중소기업 전속작가를 1년, 지역 창조기업 대표를 2년, 청소년 강사를 1년, 그리고 현 직장에서 또 2년을 머무르고 마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다들 짧은 기간이었지만, 각 환경 속에서 가장 성공할 수 있을 만큼의 성공을 맛본 후 마감했다. 대안학교에서도 사실상 교감의 역할에 가까운 일을 맡았고, 점장이나 다름 없던 까페 시절에는 손님을 2.5배 정도 늘렸다. 전속작가 시절에는 평창동계올림픽 마스코트 캐릭터 제작에 참여했고, 내가 대표를 맡았던 창조기업은 지역 우수 유망 기업으로 뽑혔고, 1억원짜리 국책 사업에도 참여했다. 강사 시절에도 호평을 받았고, 이번 직장에서도 지역 최우수 업체로 직장을 성장시켰다. 돌이켜보면 남 좋은 일은 다 시키고 살았는데, 왜 때문에 나는 늘 이렇게 곤궁하고 위기에 몰려야 하는 것인가... 우주의 신을 만나면 커피를 마시며 진지하게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사라지는 직장에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다. 공교롭게도 두통이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 이 글도 길게 쓰여지지 못하고 곧 마감되고 말 것이다. 기이하게도 마음이 불안으로 가득 차지 않고, 오히려 평온하다. 정말 출가를 결심해야 하는 때인가 싶기도 하여, 산 중의 깊은 암자에서 민머리로 소설을 쓰고 있는 나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몹시 어울렸다. 하지만 중이 되지 않는 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 상상을 멈췄다. 내가 중이 되면 우리 집의 반려인형 아이들은 누가 기른단 말인가. 

 

무언가 삶의 한 장이 의외의 전개와 함께 넘어간다.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정말 예상을 못하겠지만, 곧 대박이 날 거라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내 사주 운세를 은근히 믿어보기로 한다. 할 수 있는 일, 하고픈 일, 해야 할 일들을 다만 최선을 다해 수행해 나가는 수밖에 없겠지. 쓸쓸한 나날이지만 크게 불행하지는 않다. 아무튼 봄이 와서 그런가보다. 

 

 

2020. 4.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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