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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모처럼 새벽에 일어나

멀고느린구름 2018. 3. 18. 07:47

모처럼 새벽에 일어났다. 4시 50분 즈음이다. 철원과 파주에서 살던 시절에는 항상 5시 반 즈음에 일어나서 소설을 쓰곤 했었다. 서울 연남동으로 와서도 2014년 무렵까지 지키던 습관이 2015년경부터 사라졌다. 의무적으로 글을 써야만 하는 직장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다. 글로 먹고 살게 되면서부터 글을 쓰는 시간이 사라지게 되었다니 고약한 아이러니다. 


모처럼 새벽에 일어나 그동안 벼르던 몹시 논쟁적인 글을 써보려고 커피도 내리고 마음을 가다듬었으나... 현재 7시 20분까지 한 자도 쓰지 못하고 결국 이 글을 쓰고 있다. 공부를 좀 더 하고 써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쓰지 않았지만, 실은 에너지가 부족한 것 같다. 하는 일도 별로 없이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 에너지는 점점 고갈되어 간다. 아마도 내 에너지의 대부분이 정신에서 추출되기 때문일 거다. 


돈을 벌기 위해서 벌써 여러 편의 이력서를 썼지만 나는 여전히 집에 유배된 상태다. 과거에 유배된 선비들은 월세라도 안 냈지, 나는 꼬박꼬박 월세도 내고 공과금도 내야 하고, 사기꾼 덕에 얻은 빚도 갚아야 하니 숨만 쉬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돌이켜보면 태어나서 중학교 2학년생 시절까지의 14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생존'에 대한 압박감에서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따지면 군복무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컸으나 그 시절만은 단 한 번도 돈 걱정을 해본 일이 없다. 어쩌면 그래서 그 시절에 장편소설을 두 편이나 완성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그런 건 줄 알았다면 군복무를 연장했을 텐데. 물론 그런 건 줄 알았어도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다; - 


대한민국은 돈이 없으면 삶을 살 수가 없는 나라다. 가지고 있는 돈이 0에 수렴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아마도 나처럼 절대적으로 나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서도 돈을 얻을 수가 없어서, 진정으로 0에 가까워져 본 사람은 우리 세대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절체절명의 감각을 그나마 공유하는 한 친구가 있어 해마다 가끔 만나 안부를 주고 받는다.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우리는 서로 암묵적으로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다지 나아지지 못했음을. 둘 다 소위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뭔가 고집스럽게 별로 돈이 되지 않는 일들만을 선택하며 살아왔다. 선택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싶지만... 어째서 우리가 가치 있다고 선택한 일들은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지 않았는지 라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생각하게 되면 이 글은 캘리포니아로 가버리고 말 것이다. 


모처럼 아침에 쓸데없는 글을 쓰고 있으니 캘리포니아에 가보고 싶다. 사실은 캘리포니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미대륙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은 안다. 캘리포니아에 가려면 요즘 쓰고 있는 칼럼의 원고료를 한 푼도 쓰지 않고 4개월 동안 모아야 할 것이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기 전에 아사하고 말겠지. 


30대 중반에도 이렇게 궁상맞은 글이나 쓰려고 작가의 재능을 지닌 채 태어났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역시 좀 더 이른 나이에 결단을 내려서 아이돌의 길을 갔어야 하는가 싶다. 나의 결단에 응해줄 기획사가 과연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과거란 원래 무릉도원이 되는 것이니 그 정도의 망상은 받아주었으면 한다. 


이력서의 편 수가 10장을 넘기 전에 모쪼록 유배 상태가 끝났으면 싶다. 10장을 넘기는 상황을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역시 고집스럽게 될만한 곳에 이력서를 쓰지 않고, 재밌어 보이는 곳에만 메일을 보내고 있다. 참 재미 없다. 


2018. 3. 18. 멀고느린구름.


추신 : 부디 글에도 음원과 같은 과금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 그랬다면 나는 벌써 집을 한 채 지었을 거다 -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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