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친구의 여자친구 - 내일은 개학일이다. 얼마전까지 머리 위에서 끝없이 빗방울을 떨구던 구름들이 이제는 아득히 멀리서 떠다니고 있다. 카페오레를 절반쯤 마시고 보니 컵의 벽면을 따라 지저분한 자국이 남는다. 여자친구가 오기로 한 시간이 34분 지나있다. 아니, 아직 28분이다. 커다란 유리창 밖에서 가게들의 불이 켜진다. 더러는 이미 켜져 있거나 혹은 오히려 꺼지고 있다. 무심하거나 유심히 그 모습을 바라본다. 휴대폰 불이 켜진다. 진동 모드 혹은 매너 모드일 것이다. 혹은 둘 다일지도 모른다. ‘미안, 조금 늦었네. 지금 모퉁이야. 신호등만 바뀌면 바로 갈게.’ 모퉁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아니 조금은 신경 쓰인다. 비틀즈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떠오른다.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이다...
- 바닐라 - 한 때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강아지 인형이 있었는데, 그 강아지 이름은 아마 바닐라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디로 간 걸까. 혹은 언제 간 것일까. 방학이 되어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 하루 종일... 나는 바닐라를 찾고 있다. 10년이나 넘게 잊고 있던 것이 왜 갑자기 이리도 중요해진 것일까 자문해보지만 딱히 답은 없다. 다만 지금은 바닐라의 까맣고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내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을 뿐. 책상 서랍과 옷장 구석구석. 침대 밑. 심지어 찬장 속과 김치 냉장고 안까지 들여다보았으나 바닐라는 없다. 엄마는 내가 아침부터 수선을 피우는 걸 보며 "우리 새끼가 드디어 제 손으로 방 청소를 하네." 라며 대착각 중이어서 바닐라의 행방을 섣불리 물을 수도 없다. 결자해지라는 사자성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