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날(2) “누… 누구시오.” 나는 분명히 그렇게 물었다. 그 사람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느닷없는 내 물음에 놀란 그 사람은 우산을 쥔 오른 손에 왼 손을 모으고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합장을 한 거다. 당시 나는 승복차림이었으니, 아마 머리를 기르는 법사겠거니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영주에 조그만 의복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입니다. 제 행색이 너무 누추해서.. 부처님 앞에 누가 된 게 아닌지..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대뜸 사과부터 하는 것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물어본 목소리가 다소 컸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마 내가 화를 내는 것으로 착각한 것 같았다. 기왕 법사 흉내를 낸 김에 그 사람의 이름이며, 나이며, 영주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사연이며 하는 것들도 알아보고 싶었다. 나는 그 사..
넷째날(1) 딸아, 오늘은 약속대로 너에게 조금 어처구니 없고, 또 너무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려한다. 네가 대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식사를 하는 식탁에서 그 일을 고백했을 때 아빠는 그저 놀라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네가 진보정당의 청년당원이 되어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속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 되리라고 여겨 마음의 채비를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마 네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일 거야. 네 엄마와 혼인은 했지만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너를 뱃속에 품게 되었고, 결국 네가 태어났지. 무정한 아빠는 네가 태어나는 순간을 곁에서 지키지도 않았구나. 네가 태어나고 이틀이 지나서야 출장에서 돌아와 너를 보았다..
셋째날 딸아, 오늘은 특히 피곤하구나. 무리해서 산행을 한 탓이겠지. 아무튼 아빠는 약속을 지켰다. 부석사에 다녀왔단다. 시외터미널에서도 한참을 버스를 타고서야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어릴적부터 종종 다녀오던 곳이었단다. 나는 공대생이었지만 아주 잠깐 고시 공부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이곳 부석사에 방을 하나 얻어 기거한 적도 있었어. 아들이 고시 공부를 하겠다니까 할아버지는 무척 신이 났던 모양이다. 나는 고작 2개월만에 하산해버렸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2개월의 시간은 내 마음 속에 뚜렷한 기억을 남겼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사람에게는 꼭 하나씩 있게 마련일 거다. 네게도 그런 기억이 있을까. 없다면 아마도 언젠가 그 기억이 너를 찾아 올 게다. 부석사 버스정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