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래서 말인데, K의 목소리가 진지하다. 응.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우리 서로 정리해야할 것들을 정리하자구, K는 정해진 대본을 읊듯이 말한다. 분명 몇 번이고 되뇌어본 말일 것이라 여기니 피식 웃음이 난다. 너도 참 이럴 때 웃음이 나와? 그래도 우리 사귄 게 자그마치 7년이었다고, K는 당황한 표정이다. 응, 그 7년이 이렇게 기묘한 곳에서 끝이 난다니 웃음이 나오네. 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정리한다는 말일까. 7년의 세월을, 그 속에 깃든 갖가지 사연들을, 함께 갔던 장소와 함께 듣던 노래, 그동안 우리가 먹었던 음식의 품목들을 어떤 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일까.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다. 포맷이 불가능하다. 바탕화면에 있던 것을 폴더의 폴더, 그 폴더의 폴더 속쯤으..
달 -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히라노 게이치로의 을 이제서야 완독했다. 그는 내가 아직 고교생이던 시절, 한창 문예지에 소설 등을 투고할 무렵, 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고교 2학년 즈음이었던 거으로 기억한다. 을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사들고 와서 들뜬 마음으로 몇 장을 읽어내려간 후 책장을 덮어버렸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이었다. 나는 먹먹해진 마음으로 어둠을 머금은 바다를 한 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레벨이 다르다...' 같은 당대의 젊은 문청이라고 여기며, 신인작가의 패기를 주입 받고자 펼쳐든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때 헤세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반열이었다. 결국, 나는 을 다 읽지 못하고 책장에 박제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문장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