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모자를 내려놓은 남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살며시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했다. 이건 진짜다. 그런 결론에 이르렀을 때 가장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이 된 순간의 감각이 느껴졌다. 가령 아끼는 사기컵을 떨어뜨렸는데 무심코 발등으로 받아낸 것 같은 그런 느낌.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는 내 눈 앞에 이런 형태로 놓여 있었다. “음… 글쎄요. 당신의 말을 제가 95% 정도 신뢰한다고 쳐도… 미심쩍은 건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세계는 제가 이전에 살던 세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것 같은데요?” “당신이 이쪽으로 건너올 때 당신의 모든 기억들도 리뉴얼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죠. 그건 아주 미세한 작용입니다. 성냥..
어느 재즈 까페 두 페이지로 구성된 메뉴판을 받았다. ‘잇츠 온리 어 페이퍼 문’이 엘라 피츠제럴드의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글씨로 쓴 메뉴에는 커피 원두 산지의 이름들이 죽 나열되어 있다. 탄자니아, 브라질, 킬리만자로, 코나, 에디오피아, 케냐, 에콰도르, 페루. 어느 곳 하나 가본 적 없는 이국의 이름들이다. 신맛, 쓴맛, 바디감 등의 용어들이 쓰여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히 자각되지 않는다. 좋은 걸로 주세요. 그런데 몇 시까지 하죠? 열 두시까지라는 답을 듣는다. 휴대폰 화면을 켜본다. 아홉 시 삼 십 칠 분이다. 이곳은 지하에 위치하고 있어 거리에 한참 내리고 있을 눈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우 하이 더 문’으로 곡이 바뀌었다. 테이블 앞의 무대에는 무명의..
나 : 할머님, 혹시 무섭거나 하진 않으셨어요? 곱단 : 무섭기는... 나 : 그래도 당시로 치면 빨갱이라고 하면 피난민들한테 공포였을 텐데요. 뭐 흔한 예로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했다가 살해 당한 애 얘기 같은 건 저도 어릴 때 구구단 외우듯이 듣고 자랐거든요. 곱단 : 선생님이 전쟁을 몰라서 그래요. 나 : 아, 저 할머님. 선생님은 안 쓰시기로 하셨잖아요. 곱단 : 아 참, 미안해요. 나 : 아, 아닙니다. 곱단 : 전쟁 통에는 빨갱이고 연합군이고 없어요. 적어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나를 죽이려는 사람과 죽일 생각은 없는 사람, 그렇게만 나눠져요. 빨갱이라고 해서 있는 대로 사람을 다 죽이고 다닌 건 아니었죠. 마찬가지로 연합군이라고 사람을 다 살려준 건 아니었어.... 나 : 그랬군요....
本 소년은 나의 진료실에서 눈을 뜨자마자 간호를 하던 딸과 눈이 마주쳤다. 딸은 소년보다 한 살이 어렸고 아름다웠다. 딸은 소년이 생각하던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단발 머리모양과 하얀 피부, 붉은 입술, 드러날 듯 말듯 여리게 솟은 가슴. 가는 팔과 다리. 무심한 듯 자상한 성격. 소년은 딸에게 첫 눈에 반했다. 첫 눈에 딸이 자신의 여자임을 알았다. 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딸은 소년에게 물었다. 그 깡패들한테 왜 쫓기고 있었어요? 소년은 침묵했다. 쫓기고 있던 건 맞아요? 답하지 않았다. 저한테 반했어요? 소년은 답할 수 없었다. 딸은 답을 들었다. 딸이 말했다. 이렇게 맞고 다니지 마요. 슬프잖아요. 소년은 다시..
少年의 죽음에 작용한 힘에 관한 硏究 序 소년은 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힘이 있는 다른 소년들은 소년을 괴롭혔다. 소년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차례차례 괴롭힘을 당했다. 우선 소년이 지방에서 수도권 소재의 J 중학교로 전학을 온 첫날의 일이다. 소년이 힘이 없음을, 거기다 심약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간파한 것은 김 군이다. 김 군은 전국 일진 조직에도 가담해 있다는 소문이 도는 학생이다. 소년의 자기 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교사는 서둘러 교실을 빠져 나간다. 이후 발생할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다. 교사는 전학생이 오면 어떤 종류의 신고식을 당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김 군은 소년을 자기 앞에 불러 세웠다. 소년이 순순히 앞으로 나섰다. 소년은 어리둥절할 뿐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잃어버린 사랑을 찾습니다 1.신애, 조금은 거짓? 신애는 161번 버스 안을 오늘도 서성였다. 그러나 무소득. 누군가 161번 버스 제일 뒷좌석에 그녀의 남편이 누워 있는 걸 보았다는 것이었다. 벌써 며칠 밤 전의 낡은 정보인데다가 남편은 버스를 탈 줄도 몰랐지만 신애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이 허름한 스웨터와 조금 얇은 겨울바지만 입고 집을 나가서 실종 된지 벌써 네 달이 넘어가고 있건만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정. 깊은 밤에 잠긴 도시에는 창백한 나트륨등만이 주저리주저리 허공에 걸려 있었다. 신애는 자옥한 어둠이 깔린 거리 위를 마냥 발밤발밤 걸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 어둠 어느 편에 절지동물마냥 몸을 돌돌 만 채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