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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둠 속에 등불을 밝히며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해로부터 120년이 되는 해이다. 60년을 한 주기로 셈을 했던 선조들의 역법에 따르면 올해로 갑오 동학농민혁명이 있으신 2주기가 지나간 것이다. 올해는 바로 갑오년이다.
내가 갑오년과 동학농문혁명을 묶어서 연상하게 된 것은 대학교 3학년 즈음부터였다. 계기가 있었다. 강의실을 찾아갔더니 갑자기 휴강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던 날이었다. 아무런 약속도 없던 날, 갑작스럽게 아르바이트 때까지 3시간 남짓의 시간이 남아버려 나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돌아다녔다. 황학동 도깨비시장과 헌책방 거리를 기웃거리는 게 가장 만만한 소일거리였던 시절이었다. 자주 가던 헌책방에 들러 책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새로 들어온 한 전집이 눈에 들어왔다. <갑오농민전쟁> 이라는 제목의 대하소설이었다. 소설가는 <천변풍경>을 써서 교과서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는 박태원 선생이었다. 천변풍경과 갑오농민전쟁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어보였다. 이 분이 이런 것도 썼어? 라는 호기심에서 그 책을 꺼내어 읽어봤었다. - 그때 그 책을 구입하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이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되어버렸다. - 나중에서야 박태원 선생이 필생의 대작으로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하셨고, 나중에는 병상에 누워 구술로써 작품을 겨우 완성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사라진 천변풍경 - 당시에는 아직 청계 고가도로가 있었다. - 위에서 '갑오농민전쟁'을 만나 머릿속에 각인하게 되었다.
'갑오농민전쟁'과 '동학'을 연계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또 좀 더 이후였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강의를 한창 수강하러 다니던 무렵이었다. EBS로, 중앙대로, KBS로 도올 선생님이 강좌를 개설한 곳마다 찾아가서 열심히 동양철학의 세계를 탐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동학'을 처음 알게 되었고,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경대전> 등을 구해 읽는 등 동학사상의 세계에 매료되었었다.
역사 발전 사관에 따라 역사를 '고-중-근'으로 나눈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근대는 언제부터일까. 대체로 1876년의 개항, 1884년의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이 세 사건 중의 하나를 기점으로 본다. 나 개인적으로는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누는 발전사관의 역사관을 거부하는 입장이지만 발전사관을 수용한다고 해도 역시 가장 근대의 기폭제가 된 것은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총 2차례 일어났다. 1차 봉기는 동학의 남접주 전봉준을 중심으로 3월에 일어난 봉기이다. 삼정의 문란이라고 하는 민중을 수탈하는 조선 관료사회에 부패에 항거하여 일어난 조직적인 민중 봉기였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파죽지세로 호남 지방의 관아를 빠르게 점령해나갔다. 점령한 지역에는 집강소라는 것을 설치하여 마을 마다 대표자를 선출하여 민회라고 하는 회의를 통해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등 근대 정치의 맹아를 싹 틔웠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승기를 올려가자, 당황한 조정의 민씨 일파 세력은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하고, 청의 군대가 조선에 파병을 결정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서도 더 많은 병력을 조선에 파병하게 되고, 이 와중에 남의 나라 땅에서 두 개의 외국 군대가 전쟁을 치르는 어처구니 없는 비극 - 청일전쟁 - 이 발발하는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이런 불의한 상황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미리 정부와 시정 개혁에 대한 전주협약을 5월에 체결하고 정부군과 휴전을 한다. 싸울 명분을 잃고, 전쟁에서도 패한 청군은 본국으로 물러서지만,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고 한반도 침략의 이빨을 드러낸다. 전주협약을 통해 맺은 신분제 철폐 등 동학농민혁명의 개혁정책을 정부가 받아들여 갑오개혁에 나서지만 한반도에 자리를 잡은 일본의 만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이에 따라 동학농민군은 해산하기 이전에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한 2차 봉기를 결의하고 8월 남원의 김개남 부대의 봉기를 기점으로 9월 경상도 상주의 김현영에 이어,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의 10월 봉기까지 이어져 전국 각지에서 반외세 자주독립을 위한 거국적 2차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의 위력도 위력이었지만, 조선 정부군이 동족을 향해 총칼을 들이밀며 일본군과 연합군이 되어 농민군을 공격한 것이었다. 연합군 속에는 신분제 철폐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을 불안해한 토호와 양반, 일부 유생들이 가담해 있었다. 근대의 맹아는 푸른 싹을 피웠다가 채 꽃을 만개해보지 못한 채 그렇게 짓밟혀버렸다.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은 최초로 봉기를 일으킨 주도 세력의 리더였던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전체상을 매우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동학사상에 대한 조금 심도 있는 서술이 없는 것이 아쉬운 대목이지만 동학농민혁명 전체를 이처럼 대중들이 쉽게 읽어낼 수 있도록 서술한 책이 여태껏 희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척 반가운 책이 아닐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은 지금까지 여러 번 이름을 바꾸어왔다.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북한 학계의 명칭, 동학농민운동이라는 톤 다운된 명칭, 갑오동학란이라는 왕조 입장의 서술 등등. 그러나 많은 역사학자들이 어째서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혁명'이라는 큰 이름을 붙이려 하는 것인지 그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프랑스 시민혁명, 영국의 명예혁명 등등을 떠올리면 '혁명'이라는 명칭은 대체로 '성공한 혁명'에 붙이는 영광의 칭호이다. 실패한 것에는 쿠데타, 반란, 민란 등의 이름이 붙여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봉기에 대해 '혁명'이라는 영광의 칭호를 붙이는 이유는 뭘까. 위에서 먼저 얘기했다시피 2차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했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주도자들은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고, 조직은 와해됐다.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불과 십여년 후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너무나 완전하게 실패한 봉기가 아니었나?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을 고수하고자 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혁명은 실패하지 않았다. 전봉준의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내세웠던 12개조의 개혁 사항은 5월 전주협약을 거쳐 7월의 갑오개혁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갔다. 우리는 흔히 갑오개혁을 친일 내각에 의한 정부 자체적인 개혁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 내용은 이미 동학농민운동의 구호 속에 함유되어 있었던 것이다. 2차 동학농민혁명 역시 비록 숱한 희생을 낳았지만 그 항거의 정신은 이후 의병과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맥맥히 이어져간다. 황해도 해주의 17세 접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김구 선생의 개인사는 마치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대의하는 것만 같다. 아시다시피 김구 선생은 동학농민군에서 의병으로, 독립운동가로, 새로운 해방정국의 리더로서 그 역할을 순차적으로 이어갔다. 녹두꽃은 꺾였지만 그 뿌리는 남아 끝끝내 새 세상의 들풀이 된 것이다.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을 혁명으로써 기억해야 할 이유는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우리 민중이 강력한 정부를 상대로 처음으로 뜻을 모으고 개혁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조직적으로 항거한 최초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한민국 민주정신의 뿌리와도 같지 않을까. 1894년의 갑오년으로부터 120년이 지났다. 조선 말엽의 수탈과 부패에 비할 바는 아닐지 모르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권력을 쥔 이들과 수탈 당하는 국민 사이의 갈등이 존재한다. 힘이 없는 우리가 저 강력한 권력자와 혹은 정부에 대해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 우리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은 역시 풀뿌리 조직의 힘, 단합된 국민들의 사이의 연대일 수밖에 없다.
'동학농민혁명'은 전봉준이라는 한 개인의 역사가 아니다. 또한 수운이나 해월 선생 개인의 역량만으로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받던 백성들 하나하나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을 느끼고, 삶의 모순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바꾸어보려는 의지를 표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역사다. 우리는 그때 그 민중들의 의기를 다시 되새겨야 할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편, 우리 삶의 모순에 깨어 있고, 저항해야 할 순간에는 정의롭게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거기에 보수와 진보가 어디 있겠는가. 각자의 정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메시지이든지 메시지 자체를 발설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반민주주의적 폭력이 아닌가. 동학농민혁명이 있기 이전에 우리 백성들은 말할 수 있는 자유조차 없었다. 우리가 힘들다고, 고통받고 있다고, 좀 바꿔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1894년으로부터, 그리고 우리 현대사의 민주화 운동으로부터 비로소 쟁취된 것이다. 그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항거하는 것이 응당하지 않겠는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어떤 국민들에게는 좋은 시절이고, 또 어떤 국민들에게는 오늘날이 끔찍하게 답답한 시절일 수 있다. 어떠한 시절이든지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고, 우리 시대의 정의, 우리 삶의 바람직한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멈춰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시대가 어둡다고 여길 수록 우리는 우리 각자의 등불을 환하게 밝히고 깊어져야 한다. 나는 요즘의 우리 사회가 내부적으로든 국제적으로든 1894년의 조선과 많이 닮아 있는 것만 같다. 심지를 다시 돋우워야겠다.
2014. 8. 12.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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