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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전기면도기를 찾아서 (2006. 7. 28.)

멀고느린구름 2014. 9. 3. 16:05

전기면도기를 찾아서 



애용하던 전기면도기가 고장난지 이틀째. 성장 속도가 빠른 나의 수염은 점차 짙어져서 급기야는 안정환님 수준으로 자라나고 말았다. 어린애가 아빠 콧수염 훔쳐다 붙인 것 같은 나의 얼굴은 너무나 코믹하여, 이런 코믹스 버젼으로는 도서관에 출근할 수 없어! 라고 비명을 질렀다. 물론 -5 정도의 볼륨으로. 

출근시간까지 두 시간의 여유. 나는 새로운 전기 면도기를 구입하기 위해 대모험을 시작하였다. 구멍가게에 라면 사러 가는 기분으로 시작된 나의 모험은 그러나 예상 외의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동네 구멍가게 전기 면도기 없음. 조금 큰 슈퍼마켓에도 없음. 그것보다 조금 큰 동네 할인매장에 역시 없음. 편의점, 과연 없음. 선물가게 당연히(?) 없음. 철물점 있을리가 없음. 전기 수리상, 있었으나 없음. 각종 가전제품도 함께 진열해 놓은 동네 가구점 아저씨 왈 아 그게 지금 마침. 마을 버스를 타고 옆 동네의 대형 할인 매장, 절망적으로 없음. 나는 결국 두 동네를 두 시간 동안 헤매었으나 전기 면도기를 발견하는데 대실패하고, 김흥국 아저씨의 호랑나비춤 같은 걸음 걸이로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이 정도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니, 그럼 일회용 면도기를 쓰면 되잖아요? 라고 마리 앙뜨와네뜨처럼 말할지도 모르겠다. 코난 도일이나 애거사 크리스티 좀 읽어본 독자들은 이미 냄새를 맡았을지도. 그렇다! 나는 사실 보통 면도기를 못 쓴다- -; 

중학교 때 막 수염이 나기 시작할 무렵 나는 처음으로 아빠의 면도기를 훔쳐서 면도를 시도했었다. 그러나 아뿔싸. 나는 면도를 하려다가 피범벅이 된 손을 구경해야만 했다- -; 입술 주변을 서걱서걱 베어버린 것이다. 그때의 트라우마로 나는 면도 공포증이 생겨 절대로 면도기를 수염 근처에도 갖다대지 못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 나의 면도는 주로 가위에 의해 힘겹게 이루어졌고,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아빠의 전기 면도기를 낚아채 편하게 면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전기 면도기가 없다는 것은 털보 아저씨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똑같은 일! 그러나 아무 곳에서도 팔지 않다니! 그 많던 면도기는 누가 먹었을까! 출근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8분! 나는 용단을 내려야 했다. 안정환을 따라해봤다고 너스레를 떨며 도서관 사람들 앞에서 베시시 웃어야 할까, 이 참에 트라우마를 극복해 볼 것인가!

나는 결단을 내렸다. 인간은 상처를 딛고 성장하는 거야! 나는 동네 슈퍼에 달려가 나름 괜찮은 고급 언플러그드(?) 면도기를 데리고 왔다. 처음 해보는 면도라 네이버 지식 검색으로 면도하는 이론을 학습한 뒤 공포를 삼키며 면도를 시작했다.  역시나 초보답게 실수를 하여 피가 나고 말았다. 그래도 예전처럼 철철 흘러내려 손을 벌겋게 물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면도를 끝내고 나니 왠지 나의 키가 0.5센티미터 자라난 듯 했다. 의외로 상큼한 느낌.

거울 속에 비친 나를 자랑스럽게 쳐다보았다. 해냈다. 국제면도협회로부터 면도자격증을 지급받은 듯한 뿌듯한 느낌이었다. 룰루랄라 도서관으로 향하는 나의 깃털 같은 발걸음. 훨훨훨.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나를 위한 박수소리처럼 들려왔다. 

사람은 언제나 과거의 어둠에 지배당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과거의 그림자에 잡혀 미래를 망치기도 한다. 살짝 뒤돌아본 과거는 때로 크고 아프고 무섭다. 그러나 떳떳하게 돌아서서 마주선 과거는 의외로 작고 약한 모습이기도 하다. 어릴 때의 나는 견뎌내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라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내가 거울 앞에서 나의 과거와 마주섰듯이. 누구나 상처를 마주하고 정면으로 대결할 때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리라. 얏호! 나는 하나의 트라우마를 이겨냈다. 착하다. 참 잘했어요~


2006. 7. 28.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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