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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61년 2

멀고느린구름 2013. 9. 20. 05:58




나 : 먼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노파 : 김곱단입니다. 

나 : 네, 김곱단 할머님이시군요. 올해 연세는 어떻게 되십니까.

곱단 : 엊그제가 팔순이었어요. 

나 : 아, 80세가 넘으셨는데도 이렇게 정정하시군요. 듣기로는 직접 저희 잡지사로 인터뷰 요청을 해오셨다는데, 특별한 연유가 있으십니까?

곱단 : 부끄럽지만... 제가 초등학교를 올해서야 졸업했어요. 한글도 이제 막 읽을 수 있게 되고 보니 꼭 새로 사는 것만 같고... 별 의미 없는 생이었지만, 그래도 80 먹은 노인네가 가슴에 품은 얘기 한 자락 누가 들어주면 좋겠다 싶어서 늦게 배운 글씨로 편지 한 통 보내봤지요. 

나 : 네에. 그러셨군요. 편지를 보니깐 어떤 분을 찾고 계시다고 쓰셨는데 어떤 분인가요. 

곱단 : 61년 전에 한 남자애를 만났고 마음에 품었지요. 6.25 동란이 아직 끝나기 전이었고, 나는 고모네를 따라 가까스로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와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던 처지였어요. 그래도 내 나이 꽃다운 열 아홉이었습니다. 어느 때든 어디든 열 아홉은 열 아홉이지요. 

나 : 열 아홉이요... 아... 할머님, 참 고우셨겠습니다. 

곱단 : 고왔지요. 참 고왔지요. 세상이 그렇게 난리가 났어도 꽃은 피어나고 하늘은 맑았어요. 봄이 왔을 때... 그 시절의 봄을 선생님은 상상할 수 없을 거에요. 피 비린내를 뚫고 온 사람들이 맞이한 봄은 단순한 봄이 아니었어요. 세상의... 온 세상의 봄이었지요. 사람들은 온 몸으로 봄을 맞았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도,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도 봄은 공평하게 왔었어요. 

나 : 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봄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희미하게 나마 그 설렘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까, 61년 전에 한 남성 분을 만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분이 지금 찾으시려는 분이시죠?

곱단 : 네, 맞아요. 찾았으면 좋겠어요. 살아는 있는지, 살아 있다면 어디서 무얼하고 살았는지, 또 그 때의 약조를 잊지는 않았는지요. 

나 : 약조요? 그 분과 어떤 약속을 하셨나봅니다. 

곱단 : 했지요. 굳게 굳게 새끼 손가락까지 걸고 했지요. 

나 : 그러셨군요. 어떤 약조인지 참 궁금합니다.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노파, 아니 김곱단 할머니는 몇 차례 입술을 열려다가 이내 닫아버리기를 반복하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눈가에 그렁그렁 물기가 어렸다. 나는 연신 수정과만 들이키며 김곱단 할머니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할머니는 계속 말을 하지 못했다. 잠시 쉬었다 하자고 제안했다. 김곱단 할머니는 연분홍 옷고름으로 눈가를 훔치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으로 나와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연기가 퍼져나가는 허공은 푸르기 그지 없었다. 어제보다 높아진 하늘을 보니 가을이 오고 있구나 싶었다. 설마, 치매 노인은 아니겠지. 슬쩍 김곱단 할머니 쪽을 훔쳐보며 생각했다. 편집부장의 오지랖은 알아줄만 했다. 덕분에  잡지는 아무도 읽어보지 않을 법한 무색무취의 글들로 가득 찼다. 부장은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대한민국의 미시사가 된다며 눈을 빛내곤 했다. 그런 대의에 생활형편을 희생하고 싶은 마음은 쌀 한 톨만큼도 없었다. 대학을 나와 늦은 나이에 군복무를 마치고 보니 나는 세상에 쓸모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던 것 뿐이다. 쓸모 없는 인간을 받아준 것은 쓸모 없는 잡지사 뿐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열심히 하기도 했었다. 경력을 쌓는 기간이라고 생각했고, 무명의 잡지사지만 일정한 실적을 쌓고, 성과를 내면 추후에 좀 더 쓸모 있는 곳으로 이직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는 사이 7년을 넘게 사귀어 온 연인이 나보다 연봉이 두 배 높은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날 연인에게 축하의 의미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했고, 집에 돌아와 남성연대 카페에 회원가입 신청을 했다. 고추잠자리가 날아와 겁도 없이 피고 있는 담배 위에 앉았다. 팔을 휘저어 쫓아버렸다. 텅빈 하늘로 쫓겨나는 고추잠자리의 뒷 모습이 애잔하다. 사소한 일에도 후회가 너무 많았다 나는. 현무암 위에 담배를 비벼 끄고 꽁초를 정원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돌아섰다. 깜짝. 김곱단 할머니가 어느새 툇마루까지 나와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며 고개를 숙였다. 김곱단 할머니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매미들이 쏴아하며 일제히 몸을 떨었다. 




2013. 9. 2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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