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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8

멀고느린구름 2012. 7. 11. 06:25

 


  흰색 블라우스에 파란색 스웨터를 덧입은 소녀가 앉은 소년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녀 쪽에서 소년 쪽으로 실바람이 불어왔다. 메밀꽃 내음이 훅 끼쳤다. 흡사 그 내음이 소녀에게서 오기라도 한 듯이 소년의 가슴이 뛰었다. 소녀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깨끗하고 조그만 얼굴이었다. 걸려 있던 달이 떨어져 오기라도 한 듯이. 소녀는 소년의 대답을 기다리고 섰다. 소년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맞을 거에요. 음... 아마도. 그렇겠죠?”
“하하, 그게 뭐에요. 좀 더 확실하게 대답할 수는 없어요?”
“아, 그러게요. 음.. 제가 알기로는 분명히 맞아요.”
“으음.”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웃음을 참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소년은 기분이 상해버렸다. 바위에서 일어나 이효석 생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못가서 뒤를 돌아다 보았다. 소녀가 소년이 앉았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메밀밭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소년은 함께 나란히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설랬다. 달빛이 점점 걷히고 있었다. 이제 들판에는 햇빛 반 달빛 반이었다. 소년은 몇 걸음 더 걸어가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소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멀리서도 소녀가 피식 하고 웃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소녀가 손짓을 했다. 소년 더러 오라는 것이다. 소년은 마지 못한 척 자기가 앉았던 바위쪽으로 걸었다. 소년이 도착하자 소녀는 자기 옆 자리를 내어주었다. 나란히 앉기는 영 민망해서 소년은 그대로 서 있었다. 소년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왜.. 부르셨어요?”

소녀도 바위에서 일어났다.

“아니, 괜히 저 때문에 가는 것 같아서요. 저 이제 일어날 거니까 다시 앉아 있어도 괜찮다고요.”

소녀는 바지에서 흙을 털어냈다.

“그럼.”

  소녀는 살짝 목례를 하더니 아까 소년이 걸었던 쪽으로 걸어가버렸다. 소녀가 간 뒤에도 소년은 바위 위에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더 이상 달빛에 빛나는 메밀꽃이며, 꽃 내음이며 아무것도 마음을 흔들지 않았다. 소년은 몇 번이고 후회했다. 같이 따라 갈 걸. 소녀는 이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소년은 소녀의 생김새며 목소리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달빛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소녀의 모습을 곱씹어 생각할 수록 이제까지 본 적이 없던 미인이라고 여겨졌다. 소녀는 어째서 이 어슴새벽에 소년과 같은 곳에 있게 된 것일까. 소녀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 소녀가 사는 곳이나, 다니는 학교는 어디에 있을까. 소녀의 이름과 소녀가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소년은 소녀가 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떤 다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소년의 생이, 혹은 어슴새벽의 공기가 소년을 충동질한 것이었다. 얼마간 달리자 함께 문학기행을 온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일행의 당황스런 시선을 느끼면서도 소년은 계속 달렸다. 소녀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효석 생가에도 소녀는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없었다. 소녀는 없었다.

  여행 프로그램에 따라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소년은 메밀묵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봉평장으로 장소를 옮기겠다는 진행요원의 말에 소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년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기억나는 대로 소녀의 모습을 그렸다. 잊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기억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낭만적 기대를 품었다. 그로부터 소년은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아무런 여자아이와도 사귀는 관계가 되지는 않았다. 소년에게 마음을 보인 여자아이 중 누구도 소녀와 같지 않았던 것이다. 




2012. 7. 1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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