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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15

멀고느린구름 2012. 6. 30. 07:47





20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녀는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그남이 아닌 그남의 학과 선배에게. 올 봄 지방지의 신춘문예로 등단한 선배였다. 키는 보통. 얼굴은 훈남과. 유행과는 상관없이 무태 안경을 고수하는 이였다. 남자로서의 매력은 덜했지만 글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와 결합했을 때는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이제 갓 입학한 1학년 새내기였던 그남은 그녀에게 소설가가 되는 방법따위를 일러줄 수 있는 위치가 되지 못했다. 한 발짝 물러서서 고작 스물 세살에 불과했지만 등단 선배의 말을 잠자코 듣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써. 그리고 많이 써. 그런 다음에 많이 버려. 그러면 돼. 그게 다야.”

“그렇죠... 그런데 그게 어려워요. 제일 어려운 일 같아요.”


그남은 마음 속으로 선배의 말을 따라했다. 우선 써. 그리고 많이 써. 그런 다음에 많이 버려. 만약 그녀가 중학생 시절의 그남에게 물어보았더랬도 해줄 수 있는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같은 조언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무게감은 달라지는 것이었다. 이제 막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임에도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도 그녀와 선배는 계속해서 황순원이니, 카프카니, 헤세니, 제임스 조이스니 하는 작가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남은 연거푸 자기 앞에 놓인 술잔만을 비워내고 있는 것이었다.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 채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남이 첫눈에 반한 여자는 반한 지 불과 1시간 여만에 다른 남자의 섬으로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공무도하가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그남은 노골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소설’이라고 발음할 때의 동그란 입모양과 가랑비 같은 목소리가 특히 좋았다. 살짝 찌푸리는 미간과 가느다란 눈썹도 귀여웠다. 까만 눈동자 속은 가없이 깊어보였다. 하얀 피부와 살짝 웨이브가 진 검은 머리카락도 그녀를 어딘가 소설 속에 나오는 소녀 같이 보이게끔 했다. 그남은 어디선가 그녀를 한 번 즈음 만난 것만 같다는 기시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남은 지방에서 상경했고, 그녀는 서울 토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선배님은 왜 소설을 쓰세요?”


그녀가 물었다. 선배가 답했다. 


“글쎄,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아아..”


그남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혹은 영원한 파멸의 입구에 들어섰다고 여겼다. 그녀는 선배와 사귈 것이다. 그남은 감히 그녀를 형수님 대하듯 하며 쳐다볼 수도 없게 될 것이다. 혹, 끝나지 않을 짝사랑의 굴레에 다시 빠지게 될 것이다. 그남은 술잔을 드는 것도 모자라 술병을 채로 마셨다. 사람들이 말렸다.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도무지 적당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 술을 마셨다. 단지 술을 연거푸 마실 뿐 별다른 주사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자, 이내 사람들은 그남에 대해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얼마나 마셨을까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그남은 자기 앞에 그녀가 앉아 있는지 조차 정확히 분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실내가 한여름처럼 더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았다. 그남은 낡은 호프집 입구에 아무렇게나 주저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보름달이 떠있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좋았다. 조금쯤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오늘 달이 엄청 크네요.”


그남은 깜짝 놀랐다. 자기 바로 옆에 그녀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환각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해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지만,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다. 


“술 많이 마셨어요?”

“아.. 네. 조금.”

“술 마시는 거 좋아하나봐요?”

“아뇨. 오늘 처음 마셔보는 것 같은데요.”

“에? 정말?”

“네. 아마도.”


그녀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남은 귓가가 간지러웠다. 그녀는 옆 자리에서 심호흡을 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자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기분 좋은 술냄새라는 게 있다는 것을 그남은 처음 알았다. 


“후... 너무 따분하지 않아요? 저기서 하는 얘기들?”

“네? 아 네 좀.”


그남은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장단을 맞추었다. 


“그쵸? 특히 앞자리에 앉은 그 선배 있죠. 어찌나 잘난척인지... 아니, 뭐 등단이 벼슬인가. 이제 겨우 스물 세살이면서 대단한 문단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에요. 느끼하게.”


그남은 술이 확 깼다. 가슴 속으로부터 청량한 공기가 확 퍼지는 느낌이었다. 


“좀 느끼하긴 했어요.”


차분하게 장단을 맞추었다. 


“작년에 청소년문학상 대상 받은 분 맞죠? 아까 이름 듣고서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이름인데 도무지 생각이 안 나서 한참 고민하다 간신히 떠올렸어요. 나 그 소설 엄청 감명 깊게 읽었는데... 미안하게도 쓴 사람 이름은 눈여겨 보질 않아서요. 뭔가 이름이 독특했던 것 같긴 한데. 죄송.”


그남은 밤하늘의 달이 심장처럼 쿵쿵거리며 뛰고 있다고 느꼈다. 너무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되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들이 서로 먼저 앞서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간신히 한 마디만 했다. 


“맞아요. 저 맞아요.”

“역시! 그쵸? 나 작년에 그거 읽고 이 사람은 나랑 같은 나인데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나하고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사람은 이미 기성작가 레벨이다라고 여겼어요... 부럽고 또 한편 화가 나기도 하고, 혼자서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사람을 동경했다가 미워했다가 그랬어요. 웃기죠? 근데... 그 소설이 작가가 되기를 영영 가슴에 품고 사는 노인의 이야기잖아요.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녀는 거기서 한참을 망설이다 물었다. 


“그쪽은 왜 소설을 쓰세요...?”




2012. 6. 3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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