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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7

멀고느린구름 2012. 5. 25.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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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니?”


남자는 여자에게 물었다. 


“행복해.”


여자가 답했다. 날짜 변경선을 지나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지구 남동쪽 끝에 위치한 뉴질랜드의 북섬, 그 중에서도 오클랜드나 웰링턴이 아닌 라에티히라는 시골마을에서 두 사람이 만날 줄은 몰랐다. 여자와 남자가 나란히 앉은 언덕 뒷편으로는 라타나 교회가 미대 수험생의 정물화처럼 놓여 있었다. 남자는 대뜸 행복에 대해 물어놓고는 말이 없었다. 


남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둘이 만나기까지의 자초지종을 나누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친구의 출장에 동행취재 작가라는 명목으로 함께 하는 중이었다. 남자의 여자친구는 유명 출판사의 에디터로 애거사 크리스티와 함께 추리소설의 여제로 꼽히는 나이오 마시의 판권작 출판계약을 위해 뉴질랜드를 방문 중이었다. 여자친구가 오클랜드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동안 남자는 한가로이 주변을 탐방하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남편과의 결혼 10주기를 기념하는 여행지로 이곳을 택했지만, 장거리 비행 끝에 뉴질랜드에 도달하자마자 남편이 심한 독감에 걸려, 남편을 혼자 숙소에 두고 여행 중이라고 말했다. 휴가기간이 4일 남짓 뿐이기 때문에 열심히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남자는 언젠가 책에서 단아한 라타나 교회의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 가게 되면 반드시 라타나 교회만은 보고 오리라고 마음 먹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침, 기회가 주어지자 자연히 발길이 이리로 이어졌다는 설명이었다. 여자는 라에티히 로지라고 하는 숙소 로비에 놓여 있던 가이드 책자를 보고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목가적이며 비밀스러운 풍경. 각자의 시간과 각자의 삶 속에서 선택한 결정들이 어떻게 두 사람을 한 날 한 시 한 자리에 모이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는 그저 여느 때처럼 우연한 만남이겠거니 여겼고, 남자는 언제나처럼 둘의 만남을 운명 혹은, 인연이라는 단어로 묶고 싶어했다. 


남자는 대뜸 커다란 함정같은 질문을 한 것을 후회했다. 행복이라는 말은 어딘가 엉성하고, 모호하면서, 위험한 말이었다. 행복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기도 곤란하고, 아니라고 답하기도 곤란했다. 그렇다고 답한다고 해서 무엇이 행복하냐고 묻기도 모호하고, 아니라고 답한다고 해서 그것을 깊게 파고들어가는 것도 어쩐지 예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묻고 싶었다. 아니,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온전히 배제되었던 지난 세월이 여자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여자는 행복하다고 답했다. 행복하다는 여자에게 그 행복을 제공한 당사자가 아닌 남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작별인사 뿐이었다. 여자도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어색한 침묵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작별인사를 준비해야했다. 어떤 인사가 가장 아름다울 것인지에 대해서 남자는 고민했다. 그래, 그럼 계속 행복하게 지내렴. 이라는 식은 성의도 없고 어딘가 머저리 같았다. 그랬구나, 내가 없이도 행복하다니 역시 난 너의 인연이 아니었던게 맞나봐, 이만 갈게, 건강하렴. 같은 것은 굉장히 궁상맞은 느낌이었다. 잘 생각해봐, 어딘가 불행했던 적도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은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여지를 제공했다. 오랜 고심 끝에 남자는 결정했다. 나도 행복해, 그럼 안녕. 이거라면 좋다. 어딘지 우수에 차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여운이 있고, 그럼에도 깔끔한 맛도 함께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기로 정했다. 심호흡을 했다. 


“너도 행복해보여서 다행이야. 여자친구랑 여행도 오고 말야... 너도 이제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려서 정착해봐. 늙어서 남자 혼자 사는 게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잖아.”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말을 꺼내려다 삼켰다. 여자의 말에 남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남자는 행복하지도 않았고, 결혼을 해서 정착할 마음도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여자는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아무개 친구에게라도 하는 말처럼. 남자는 생각을 바꿔 다른 말을 시작했다. 라타나 교회가 있는 언덕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나저나 여기는 정말 멋지다. 프로방스 같으면서도, 세계의 끝 같기도 해. 편안함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곳이야. 마치 저 교회는 다른 세계로 향하는 거대한 문 같지 않아?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있는 거야. 가령 온통 하얀 색으로 이루어진 세계 같은 것. 혹은 빛으로 둘러싸인 세계 같은 것 말야. 온도는 23 ~ 25도 정도로 따스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고, 맛있는 먹을거리가 가득하지. 살아오면서 그런 문들 몇 개를 그냥 지나쳐 와버렸다는 기분이 들어 요즘에는. 열어봐도 좋았을 텐데 말야. 사람은 어째서 끊임없이 불안함 마음을 안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그리 오래 살지도 않는데 말이야.”


여자는 잠자코 남자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려 등 뒤의 라타나 교회쪽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싶더니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볼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라타나 교회쪽으로 걸었다. 북풍이 불었다. 적도로부터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이었다. 




2012. 5. 25.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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