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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긴 소설

포플러나무 숲 사잇길 5

멀고느린구름 2012. 5. 2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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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퀴즈... 아도니스의 꽃말은?”


여인은 제가 품에 고이 안아 온 화병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하얀 민무늬 도기병에 한 송이 노란꽃이 피어올라온 모양이 단아했다. 병상에 누운 남정은 쉬이 입을 떼지 못하고 ‘음...’이라고 긴 소리를 내며 골똘히 생각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왔던 미소년이었던 건 알겠는데 말이야. 아프로디테와 페르세포네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 죽고 말았던. 혹시, 꽃말이 아름다운 남자 이런 건가. 나한테 어울리는데?”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남정의 얼굴을 쏘아보며


“으이구. 이제 일어나도 되겠다. 기껏 생각해서 와줬더만. 올 필요도 없었던 거 아냐? 사실은 꾀병이지?”

“미안 미안, 농담이야. 그래서 꽃말은?”

“잘 들어둬. 아도니스의 꽃말은 말야... 영원한 사랑의 행복.”

“아...”


환기를 시키기 위해 여인이 열어놓은 조그만 창에서 2월 한 겨울의 바람이 스며들었다. 선뜻한 느낌이 있었으나 싫지 않았다. 남정은 여인이 말한 아도니스의 꽃말을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영원한 사랑의 행복. 영원한 사랑의 행복. 평범한 화병이 갑자기 비범해보였다. 꽃의 노란 빛도 더 도드라져 보였다. 창밖에는 눈이 가득 쌓였다. 어제 내린 함박눈 탓이었다. 남정이 말이 없자, 여인은 어색했는지 아도니스의 꽃말에 얽힌 아이누족의 설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만년설이 쌓이는 훗카이도에 오래전부터 기거했던 민족 아이누. 그 아이누족의 여신 크론은 아버지가 자신을 용신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자 한밤 중에 집을 떠났다. 크론의 곁에는 그가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 둘은 정강이까지 쌓인 눈 속을 달렸다. 캄캄한 하늘에는 겨울의 별들이 가득했다. 맞잡은 손으로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크론의 아버지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나고자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크론의 아버지는 별들의 이야기를 듣고 크론을 찾아냈다. 화가 난 크론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크론을 꽃으로 변화시켰다. 남자는 죽임을 당했다. 영원한 사랑의 행복을 찾던 두 사람이 사라진 눈길 위에 노란 아도니스 한 송이만이 남았다. 그 후 해마다 아도니스는 영원한 사랑의 행복을 기약하며 겨울이 끝나갈 무렵 가장 먼저 눈 속에서 고개를 내밀게 되었다. 


남정은 여인의 이야기를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여인은 말을 멈추고 잠시 손을 뻗어 남정의 코에 가져가 보았다. 


“아직 안 죽었어..”


여인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놀래키지마..”


여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정은 피식 웃고 말았다. 여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3기랬지..? 너무 걱정마. 예전에 나 알던 사람도 3기였는데.. 건강해지셨고.. 아직도 정정하게 살아계셔...”

“네가 이렇게 걱정해주고 문병까지 와줘서.. 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쓸데없는 소리. 너답지 않게 약한 소리하고 있어.”

“미안.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는.. 신문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데 어떻게 몰라. 세상물정 모르고 사는 나도 다 알 정도던데 뭐.”

“문학계의 큰 별이 지다... 뭐 그런 제목인가.”

“바람계의 큰 별이 지다였던 것 같은데.”

“무슨 소리. 난 언제나 일편단심이었다고.”

“흥. 다들 웃겠다. 니가 문단 최고의 바람둥이인 건 초등학교 들어가는 내 막내 조카도 다 알아.”

“그런 건 다 거짓말이야. 사람들은 마음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으니깐.”

“그래요. 참 좋겠네요 넌. 마음이 진실해서.”


여인의 목소리에는 다소간의 노여움이 어려 있었다. 남정은 그것이 좋으면서도 어딘지 쓸쓸하게 여겨졌다. 둘의 투닥거리는 소리가 멎자 사위가 조용했다. 멀리서 눈 밟는 소리며, 자동차 경적 소리며 하는 것들이 들려왔다. 여인은 가방에서 사과를 꺼내어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남정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울컥 눈물이 솟는 것을 여러번 삼켰다. 사각사각. 이번에는 껍질 깎이는 소리가 병실을 채웠다. 남정은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며 여인의 모습을 마음 깊이 담았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여인의 저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가자 싶었던 것이다. 사과를 깎는 여인의 손은 사과의 속살만큼이나 희고 맑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들 중의 하나에. 약지에 단촐한 은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남정은 끝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들키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소리를 삼켰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남정은 행복했다. 




2012. 5. 2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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