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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어떤 날들이 내게 있었다

 

그날 저녁은 날이 흐렸다. 아니, 흐렸다기보다는 어떤 흔적을 품고 있는 날씨였다. 내일 비가 오리라는 흔적, 혹은 어제 비가 내렸다는 흔적 같은 것이 저녁 하늘의 얼굴에 담겨 있었다. 우리는 우연히 학교 후문에서 마주쳤거나, 함께 노래방에 가기로 하고 만났을 것이다. 푸른 멍자국 같은 먹구름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희미한 노을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20대 중반의 우리는 그 노을빛을 머금은 채, 아주 잠깐 인생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산다는 건 뭘까. 글쎄. 계속 이렇게 ‘글쎄’를 반복해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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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었던가, 이른 아침이었던가. 아무튼 나는 광기로 가득 차 어스름빛을 발로 걷어차며 헤어진 연인의 집으로 향했다. 불이 켜지지 않는 캄캄한 계단을 올라, 어둠을 헤치고 그이의 문 앞에 서서 한 손에 든 오리 인형을 내려다봤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절망인지, 연민인지 모를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서로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었다. 문 위쪽의 통풍용 창을 열고, 오리 인형을 방 안으로 내던졌다. 엉망진창이었던 내 두 번째 연애가 영원히 끝나는 동시에 영원한 죄책감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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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버스 안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버스는 도시의 불빛들을 삼키며 여의도와 이태원 사이를 순환했다. 나는 무언가 말을 쏟아냈지만, 나 스스로도 그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말들이 어떤 우주를 끝장내고, 어떤 우주를 탄생시킬지 알지 못했다. 함께 있는 것이 이보다 편안하고, 즐겁고, 무엇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세계를 이룬다면 그 세계는 아주 견고하리라고 상상했던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는 그날 내가 만났던 가장 온전한 우주를 거기 남겨둔 채, 혼자 버스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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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에서 나온 우리는 제기동 세느강을 걸었다. 누군가와 함께 그곳을 걷는 것은 너무도 오랜만이어서 인생의 모든 눈물이 그 밤의 강으로 흘러들 것만 같았다.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더 걸었다. 한약재들이 아무렇게나 묶여 있는 시장을 지나, 내친김에 경희대까지 갔다. 경희대는 먼 옛날 나의 첫 연애가 시작된 장소였다. 그날 밤, 불과 세 시간 정도의 시간에 우리는 우리 앞으로 펼쳐질 여섯 해의 세월을 맞이했다. 우리는 벌써부터 그 6년 뒤의 이별에 가슴이 떨렸고, 밤과 내일 아침의 시간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와 새벽 즈음 그이는 집을 향해 뒤돌아섰다. 아쉬움이 블랙홀보다 깊었다. 그날, 짙은 어둠 속으로 희미해지던 그이의 뒷모습이 마지막 이별의 메일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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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파리의 밤을 지나 파리의 아침과 마주했을 때, 단연코 내 청춘은 가장 빛나는 순간에 있었다.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다. 영원히 당신의 손을 마주 잡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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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강을 지나 ‘이제는 아름다운 어떤 날들’이 내게 있었다. 그리고, 스텔라 장의 <Stairs>보다 그 어떤 날들의 정경을 완벽히 담아낸 음반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특히, 3번 트랙 ‘어떤 날들’을 듣지 않고 마감하는 인생은 조금 덜 아름다울 것이다.

 

2022. 10. 17.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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