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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농부에게

 

숲을 좋아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가다보면 늘 갈피마다 숲 속에 앉아 있는 나를 만난다. 옅은 물기를 머금은 흙 위에 앉아 무릎을 세운 뒤, 거기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면 슬픔도 불안도 잠잠해지고는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초록의 잎새들 너머의 푸른 대양에 거대한 구름의 배들이 지났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작은 몸에서 빠져나와 영혼의 배를 타고, 마음으로만 갈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어린 시절 나에게 책을 읽는 것은 지도를 펼치는 것과 같았다. 얼마 전 읽은 책들은 항해의 지도가 되어, 숲 속의 나를 보다 선명한 세상으로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지난 여름 서울 해방촌에 있는 독립서점 별책부록에서 안리타 작가의 <리타의 정원>이라는 아름다운 지도를 발견했다. 이 지도는 법정 스님의 글보다는 더 싱그러운 풀내음이 가득하고, 노자의 글보다는 더 지상에 발을 디디고 있으며, 메리 올리버의 글보다는 더 친숙하다. 문필가 안리타 씨의 정원은 아주 소박하고 규모가 작아 보이지만, 울타리가 없기에 어디까지가 그의 정원인지 짐작할 수 없다. 지도를 따라 거닐다보면 온세상을 만난다.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한참을 묵념했다.
마음 속 그것들을 잘 보내주려고. 

오늘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의, 
꽃의 기일이었다.

- 안리타 <리타의 정원>. 85P

허영과 깊이를 나누는 경계에는 질문이 있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은 우리가 삶 속에서 언제나 과정적 존재임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불변의 진리가 있다면 우주의 시간은 태어나자마자 멈춰버렸을 것이고, 그것은 시작되지 않은 것과도 같다. 생성된 모든 것들은 다른 모든 생명들 사이에서 힘을 주고 받으며 변화한다. 변화에는 방향이 없기에, 우리는 때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가도 아득한 후방에 도착하고 만다.

코로나19의 막막한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날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조용히 <리타의 정원>을 펼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보지도, 듣지도, 맡아보지도 못한 그의 정원을 몰래 산책했다. 그러면 달빛이 번진 흙길이 나오고, 가을의 귀뚜라미 소리가 또르르 들리고, 작은 새들의 날개짓이 흩어놓는 숲의 냄새가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이토록 연하고 명징한 자기만의 땅을 일군 언어의 농부에게 경탄을 보낸다. 

2021. 2. 1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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