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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짧은 소설

그리운 사람

멀고느린구름 2021. 3. 21. 05:08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이었다. 일주일 내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던 아침 기온은 영상을 회복했다. 사무실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누가 황씨 노인의 집에 방문하는가를 두고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내 몫이 될 것을 예감했다. “김군이 가지.” 사무국장의 말에 모두들 안도했다. 

 

황씨 노인은 30년 넘게 혼자 살고 있는 독거노인으로 자기 이름도 모를 정도의 치매를 앓고 있었고, 여러 가지로 건강상황이 좋지 않아 다들 이번 혹한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 예상했다. 사실상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방문이었다. 황씨 노인이 살고 있는 쪽방촌으로 향하는 가파른 비탈길에도 눈이 가득 쌓여 엉금엉금 기어올라 가야 했다. 미련이 남은 듯 하늘에선 진눈개비가 소륵소륵 떨어지고 있었다. 수차례 미끄러 넘어지면서도 기어이 죽음을 마주하러 가는 내 신세가 가련하게 여겨졌다. 

 

문 앞에 다다라 서너번 노크를 하고, 큰 소리로 노인을 불러보았지만 아무 기척이 없었다. 죽었구나. 경찰을 부를까 하다가, 그래도 그동안 알고 지내던 이가 임종을 확인해주는 것이 망자에 대한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모해온 비밀번호를 눌러 낡은 철문을 열자, 고약한 냄새가 확 끼쳤다.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5평 남짓의 방 안은 냉동고처럼 싸늘했다. 살펴볼 것도 없이 방 가운데에 황씨 노인이 이불을 덮은 채 얼어붙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노인이 누운 자리의 전기장판에는 아직 온기가 머물고 있었다. 독거노인들은 보일러를 켜도 된다고 일러줘도 한사코 전기장판만 켜고 지냈다.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우리로서는 늘 그쪽이 더 부담이었다.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숨을 거둔 황씨 노인을 바라봤다. 그때, 무언가 내 무릎 끝에 닿았다.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났다. 

 

“스... 스... 스아...”

 

황씨 노인이 살아 있었다. 요동치는 심장을 달래며 노인의 머리맡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스아...진... 스아...진 줘.”

“사진요?”

“으..어...”

“어떤... 누구, 누구 사진요?”

 

황씨 노인은 마지막 힘을 다해 오른 팔을 들어올려 손가락 끝으로 싱크대 찬장을 가리켰다. 서둘러 찬장을 열어보니 나무액자 속에 담긴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노란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푸른 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활짝 웃고 있는 낡은 사진이었다. 황씨 노인의 눈이 전에 없이 형형히 빛나며, 사진을 든 나를 향하고 있었다. 들어올려진 오른 손이 활짝 펼쳐진 채 사진을 강렬히 원했다. 팽팽히 당겨진 실이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무액자를 손 위에 쥐어주자 노인은 사진을 최대한 눈 앞에 가까이 가져갔다. 나는 허둥대며 방 안의 불을 밝혔다. 황씨 노인은 액자 속 사진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수도 없이 매만졌다. 나는 전등 스위치 곁에 숨을 죽인 채 우두커니 섰다. 창 밖으로 다시 함박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백지가 된 허공 속에 지나버린 내 사랑의 시간들이 희붐히 떠올랐다. 

“흐어...”

 

황씨 노인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비어 있는 왼손 가에 앉아 노인의 손을 잡았다. 펄펄 끓어오르는 듯이 뜨거운 손이었다.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황씨 노인은 나무액자를 가슴에 품고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뒀다. 어느 날보다 또렷한 목소리였다. 

 

“여보... 보고 싶소.”

 

2021. 1. 3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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