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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에세이

언젠가 좋은커피

멀고느린구름 2021. 1. 31. 06:11

까페에서 커피를 내리던 때를 종종 생각한다. 대학시절 나는 캠퍼스 밖에 있던 여행동아리의 부원이었는데, 동아리방 바로 오른 편 지하에 중세 유럽풍의 핸드드립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나는 그곳에서 2년 남짓 아르바이트를 하며 커피를 내렸다. 아침마다 캄캄한 계단을 내려가 커피하우스 보헤미안의 불을 밝히고, 클래식 음악을 선곡하고, 커피 한 잔을 내려 시음해보던 매일매일은 70 노인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다.

 

30대 중반 무렵에도 1년 간 커피 내리는 일을 했다. 보헤미안 점장님의 제안으로 개운사 담벼락을 마주보고 있던 작은 카페 ‘좋은커피’의 관리를 맡게 된 것이었다. 좋은커피는 전적으로 내가 관리했던 카페였기에 더욱 애정이 컸다. 한 켠에 독립책방에서 골라온 독립서적들과 평소 좋아하던 사진작가의 사진집 같은 것들도 진열해두었고, 음악도 클래식뿐만 아니라 그날의 날씨와 계절에 맞는 다양한 곡들을 선곡했다. 좋은커피는 오직 최상의 한 잔을 제공하는 커피점이었기에 메뉴가 없었다. 보헤미안에서 그날 가장 컨디션이 좋은 원두를 공급해주면 그것으로 커피를 내려주는 자매점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좋은커피를 찾았다. 대학생부터 교수, 영화감독, 음악가, 시인, 건축가, 종교인, 주부, 소설가와 화가까지. 멀리까지 찾아와 한 잔의 커피를 즐기는 이들과 때로 몇 마디를 주고 받고, 하루가 저물면 그들이 모두 떠나간 빈 자리에 앉아 마지막 커피를 내려 마시며 개운사의 담벼락을 바라보는 일이 고단했지만 충만했다. 생계에 대한 우려만 없었더라면 더 오래 그 삶을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까... 선택하지 않은 삶들이 저 스스로 계속되고 있는 세계를 가끔 상상한다. 그 세계 속의 나와 만나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면, 오늘 날이 밝으면 지하철을 타고 안암동을 찾아가, 좋은커피의 문을 열고 조리대 앞에 서 있는 나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나는 나에게 먼저 사랑에 대해 물을 것이고, 쓰고 있는 글에 대해 묻겠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오늘 새벽에도 나는 다만 라디오 속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선율을 따라 글을 쓰고, 빠르게 식어가는 겨울의 커피를 마신다. 언젠가 어느 날에 나의 커피를 마셨던 모든 사람들이 오늘 무사하기를, 때때로 행복하기를. 

 

2021. 1. 31.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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